[회화]온양행궁도를 통해 본 온천 문화

202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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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과 9월은 피서를 위한 휴가철이자 추석 명절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평소 가고 싶었던 곳에 가 쉬거나 가족들을 만나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합니다. 왕정국가였던 조선시대에서 왕들은 수도에서 벗어나 휴가를 보낼 수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왕은 한양 내에서 거주하며 정사를 돌보며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이때 머물던 곳이 한양의 법궁(法宮)이나 이궁(離宮)입니다. 그러나 국왕이 능행하기 위해 한양을 떠나거나 오늘의 주제인 온천을 가기 위해 한양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때 왕이 궁을 벗어나 행행(行幸)시 머물기 위해 임시로 마련된 곳을 행궁이라고 하였습니다.

행궁은 이용 목적에 따라 크게 능행행궁, 온행행궁, 전란대비 행궁, 상왕이 거처하는 행궁 총 4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중 온행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하는 행궁이었으며, 대체로 온천 지역에 건립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전국에 걸쳐 온천이 분포하였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곳이 충청도 온양에 위치한 온천이지 않을까 합니다.


온양온천과 온양행궁의 모습 변화와 온천 문화

온양온천은 조선 첫 번째 왕인 태조 때부터 방문하여 왕들이 즐기곤 했습니다. 조선시대 왕이 방문했던 온천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온양행궁의 당시 모습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온궁영괴대>, 『온궁사실』<온천행궁도>, 『영괴대기』 등 문헌기록 및 회화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헌기록들을 토대로 온양행궁을 살펴보면 내정전과 외정전, 온천욕을 할 수 있는 탕실로 나누어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온궁영괴대도>, 126.5x58cm,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8216

(사진출처 : 규장각)

온궁사실, 규장각, 奎貴 178-v.1-3


회화자료로 남아있어 당시 온양 온천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수 있습니다만 조선후기에 제작되어 이전의 규모는 어땠는지 탕의 모습은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살피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자료들을 통해 온양행궁의 모습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온양행궁은 태조 시기에 임시거처가 마련된 이후 세종 연간에 온양 행궁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은 백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크게 짓지 못하도록 하여, 삼전의 욕실과 침실 체제를 그림으로 보고 받고 그 수효를 줄이게 하였습니다.

대언(代言) 등이 삼전(三殿)의 욕실(浴室)과 침실(寢室)의 체제(體制)를 그림을 그려서 올리니, 임금이 이를 보고 그 수효를 감하게 하고, 판사(判事) 배환(裵桓)으로 하여금 그림을 가지고 온정(溫井)으로 가서 본도(本道) 감사(監司)와 다시 편의한 점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 세종실록 57, 세종 14년 9월 4일 

이때 만들어진 체제는 삼전의 욕실과 침실의 체제가 그림으로 올려져 세종에게 보고 되었으며, 다음해 4월의 기사를 보면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이 전하고 있습니다.

 

"환궁한 뒤에 온정의 정청(正廳)과 동서 침실(東西寢室) 및 남북의 상탕(上湯)은 모두 다 봉하여 잠그고, 그 나머지 집에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목욕하게 하되, 남북의 다음 탕은 사족(士族) 남녀들에게 목욕하도록 하고, 남북 빈 땅에 있는 탕에도 집을 짓고, 또 월대 밑에 더운 물이 솟아나는 곳에도 우물을 파고 집을 지어, 모든 남녀들에게 다 목욕할 수 있도록 하라."
- 세종실록 57, 세종 15년 4월 16일

이 기록에 왕이 사용하는 정청, 동서 침실이 있었고, 남북의 상탕을 비롯하여 그 이하 등급의 탕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월대 밑에도 탕을 두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아 온양온천의 규모가 어느 정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천의 모습을 문헌 기록상으로만 확인하여야 하여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생각보다 온양온천에는 다양한 시설과 온천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분 별로 목욕하는 구역과 더불어 남녀 차별없이 목욕을 즐길 수 있었음이 주목됩니다.


온양 온천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관리가 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복원되며 온양 행궁의 규모에 대한 눈에 띄는 기록은 현종 대에 남긴 기록입니다.

어실은 6칸에 팔작지붕이며 온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온천 방은 총 8칸의 규모이며 나머지 초사를 합하면 100여 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 현종실록 10권, 현종 6년 4월 21일 정축 4번째기사

또, 1795년에 간행된 『영괴대기』와 『온궁사실』을 보면 당시 모습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어 자세히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내정전(內正殿), 외정전(外正殿)과 온천(溫泉)이 중앙에 위치하고, 담장으로 구획된 마당과 중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정전 북측에 구탕(舊湯), 온천(溫泉) 북측 담장 밖으로 신정(神井)과 비각(碑閣)이, 그리고 북서측에 영괴대(靈槐臺)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온천의 담장 너머에 종친부(宗親府), 홍문관(弘文館), 상서원(尙瑞院), 승정원(承政院), 사간 원(司諫院), 한림원(翰林院) 등 왕을 보좌하는 여러 국정기관이 위치하고, 병조빈청(兵曹賓廳), 별무사청(別武士廳), 무예별감청(武藝別監廳) 등 군사기관과 왕의 옷을 짓는 관청인 상의원(尙衣院), 수라간 등 부속건물 들이 마치 도성 궁궐을 축소하여 옮겨온 것처럼 위치하고 있는 점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왕이 오랜기간 머무르거나 자주 방문하여 생긴 흔적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온양 행궁에는 이러한 건물들 이외에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우물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오래된 우물은 세조가 충청도를 순수하고 온천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발견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세조는 따뜻한 탕정 옆에 차가우면서도 단맛의 맑은 물이 넘쳐나는 것을 매우 상서롭게 생각하여 주필신정(駐蹕神井)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 주필 : 임금이 행행하는 도중에 거가를 잠시 머무리거나 정숙하는 일

- 신정 : 신이한 우물

 

“천순(天順) 8년(1464년) 봄 2월에 우리 주상(主上, 세조) 승천체도 열문영무 전하(承天體道烈文英武殿下)께서 남쪽으로 충청도를 순수(巡狩)하시면서 속리산(俗離山) 복천사(福泉寺)에 거둥하사 혜각존자(慧覺尊者)를 만나 보시고, 그 뒤 3월 초 1일에 온양군의 온탕(溫湯)에 거가를 머무르셨다. 그러한 지 4일 만에 신천(神泉)이 홀연 솟아올라 뜰에 가득히 흘러 찼다. 성상께서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고 명하여, 그곳을 파니, 물이 철철 넘쳐 나오는데 그 차기는 눈과 같고, 맑기는 거울 같고, 맛은 달고도 짜릿하고, 성질은 부드럽고도 고왔다. 명하여 수종한 재상들에게 반포해 보이시니,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 서로 이르기를, ‘옛날에 없던 것이 지금 새로 생기어 탕정(湯井)의 물은 따뜻하고 이 우물은 차니, 이는 실로 상서의 발로이다.’ 하여, 8도에서 표문[表]을 올려 하례하고 칭송하니, 드디어 주필 신정(駐蹕神井)이란 이름을 내렸다.” 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19, <충청도>

이후 지방지나 사진 등에서 온양행궁의 모습의 변화가 확인됩니다. 이렇듯 행궁 안에는 탕 이외에도 정무를 보는 곳, 왕을 보좌할 기구, 침실, 우물 등이 있었으며 온천도 여러 군데가 개발되어 있었음이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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