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 반구천 일원에는 한국 선사미술을 대표하는 두 유산이 나란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다른 하나는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입니다. 두 유산은 2025년 7월 「반구천의 암각화」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보유한 열일곱 번째 세계유산이자, 바위에 새긴 그림으로는 첫 번째 세계유산입니다. 그렇다면 이 오래된 바위그림은 왜 세계의 인정을 받았을까요? 등재 1주년을 맞은 지금, 반구천의 암각화가 어떤 유산인지 차근차근 들여다보려 합니다.
1. 반구천 암각화의 발견
반구천 암각화의 발견은 1970년대 초반 한국 선사미술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뜻밖에도 불교 유적 조사였습니다. 1970년 12월 24일, 동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반고사(盤皐寺) 터를 찾아 반구대 일대를 답사하던 중, 마을 주민의 제보로 천전리의 바위그림을 발견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암각화가 학계에 처음 보고된 순간이었고, 이 유산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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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조사사진,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
이듬해인 1971년 12월 25일, 천전리를 다시 조사하던 조사단은 역시 주민의 도움을 받아 대곡천 하류 쪽 절벽에서 또 하나의 바위그림을 찾아냅니다. 바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입니다. 두 해 연속 성탄절 무렵에 이루어진 발견이었으니, 한국 고고학이 받은 보기 드문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셈입니다.
두 유산은 성격이 뚜렷하게 다릅니다. 대곡리 암각화에는 사람, 고래, 거북, 배, 그물,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 자연주의적 형상이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어, 기하학적 문양 중심의 천전리 암각화와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2.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바다와 육지 생명의 기록
반구천 암각화의 한 축을 이루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의 수직 절벽 아래쪽 암반에 새겨져 있습니다. 세계유산 등재 자료 기준으로 너비 약 8m, 높이 약 4.5m의 중심 암면과 주변 10곳의 바위면에 312점 정도의 그림이 확인되며, 1995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다만 그림 수는 미세한 새김 자국을 어디까지 셀 것인지에 따라 조사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이 바위에서 구분되는 동물만 약 20여 종입니다. 고래, 거북, 바다사자, 상어 같은 바다동물부터 사슴,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너구리, 멧돼지 같은 육지동물까지, 마치 도감 한 권을 펼쳐 놓은 듯합니다. 한 연구자는 '인류 최초의 야생동물 분류 도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평가하기도 한 만큼 한반도의 식생을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특히 고래 그림이 압권입니다. 연구자들은 물을 뿜는 모양(분기 형태), 배 주름의 유무, 지느러미와 머리의 생김새 같은 형태학적 기준으로 고래의 종까지 가려냈습니다. 등재 자료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 향고래, 들쇠고래, 범고래, 상괭이 등 최소 7종으로 소개하는데, 참고래를 판별 목록에 넣는 연구자도 있어 세부 종에는 견해 차이가 조금씩 있습니다.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귀신고래의 습성, 물 위로 힘차게 뛰어오르는 혹등고래, 작살을 맞고 몸통을 비트는 고래, 부구(浮具)가 달린 줄, 여러 사람이 올라탄 배까지. 고래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새길 수 없는 장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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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반구대암각화 암면 세부 (고래잡이 장면:작살 맞은 고래,부구) (사진 출처 : 이뮤지엄) | 울산반구대암각화 암면 세부 (혹등고래의 브리칭 장면) | 울산반구대암각화 암면 세부 (새끼와 함께 유영하는 귀신고래) |
재미있는 것은 이 그림들이 '계절'까지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연구에서는 새끼를 업은 어미 고래, 겨울잠에서 깨어나 짝짓기하는 너구리, 알을 낳으러 뭍으로 오르는 바다거북, 갓 태어난 줄무늬 새끼 멧돼지로 해석하여 관찰되는 장면에서 계절성을 읽어 냈습니다. 이러한 해석을 토대로 계절에 따라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고래잡이 철에 다시 모여 결속과 동족의식을 다지던 공동 의례의 산물로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림 속 배에는 많게는 17명 가량이 타고 있어 고래잡이가 여러 집단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언제 새겨졌을까요? 사실 여기에는 지금도 진행 중인 학술 논쟁이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울산 황성동 유적에서 나온 작살(골촉)이 박힌 고래 뼈, 인근 세죽 패총에서 나온 동물 뼈의 구성이 암각화 속 동물들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약 6,400~5,500년 전), 그리고 유적 어디에도 농경과 관련된 그림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반면 청동기시대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암각화가 실제로 유행한 시기는 청동기시대이고, 논쟁이 되는 두 암각화를 빼면 신석기시대 암각화가 확인된 예가 없으며, 반구천 주변 20km 안의 청동기시대 유적 밀집도가 신석기시대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높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는 신석기시대에 제작이 시작되어 오랜 기간 이어졌다는 관점이 채택되었지만, 편년 논쟁 자체는 여전히 열려 있는 셈입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이곳에 농경이 아니라 수렵·어로의 세계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 그림이 있는 유적"이라는 단순한 설명을 넘어섭니다. 이곳에는 바다를 관찰한 눈, 동물의 움직임과 계절을 읽는 감각, 사냥과 어로에 의존했던 공동체의 삶과 의례가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3.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기하학 문양과 신라 문화가 겹친 장소
반구천 암각화를 이야기할 때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만 떠올리기 쉽지만, 거기서 물길을 따라 약 2km 상류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유산이 있습니다. 바로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입니다. 오랫동안 '천전리 각석'으로 불리다가, 명문과 암각화의 가치를 함께 드러내기 위해 2024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곳의 핵심은 기하학적 문양, 동물과 인물, 그리고 신라시대 명문이 한 바위면 위에 함께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너비 약 9.8m, 높이 약 2.7m의 중심 암면과 주변 바위면에 620여 점의 그림과 문자가 확인됩니다.
바위면은 크게 위아래 층위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윗부분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마름모, 동심원, 물결, 나선에 가까운 문양과 동물, 추상화된 인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하문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천전리에서 확인된 동물 그림만 사슴류를 중심으로 224점에 이릅니다. 문양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나와 있습니다. 동심원무늬는 태양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다수이지만 달이나 강물의 파문, 물과 농경의 상징으로 읽는 견해도 있고, 마름모무늬는 여성의 몸과 출산, 다산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연구가 많습니다.
다만 문헌 기록이 없는 시대의 산물이기에 개별 문양의 의미를 하나하나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재로서는 자연과 생명, 풍요와 의례를 담은 '기하학적 상징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기하문을 청동기시대 산물로 보는 데 학계의 이견이 크지 않고, 동물 그림까지 포함해 전체를 청동기시대로 보는 견해와 신석기시대까지 올려 보는 견해가 병존합니다. 이곳이 처음에는 수렵 의례의 장소였다가, 기하문이 새겨지는 단계에 이르러 풍요와 다산, 조상 숭배까지 아우르는 공동체 통합 의례의 장소로 성격이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아랫부분에는 가는 선으로 그어 새긴 기마행렬과 배, 용, 그리고 명문이 남아 있습니다. 정밀 판독을 통해 확인된 명문만 200개가 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입니다.
원명에 따르면 525년(법흥왕 12),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이 일행과 함께 이 골짜기에 놀러 왔다가, 글을 새기기 좋은 바위를 발견하고는 이곳에 '서석곡(書石谷)', 곧 '글 쓰는 돌의 골짜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원명이 새겨진 자리에는 원래 말 그림이 있었는데 그 일부를 갈아내고 글을 새긴 흔적이 확인됩니다. 서석곡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이 찾아와 흔적을 남기던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4년 뒤인 539년, 이미 세상을 떠난 갈문왕을 그리워하며 부인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가 어린 아들과 함께 새벽에 이곳을 다시 찾아 그 사연을 바위에 새겼습니다. 학계에서는 이때 어머니 손을 잡고 온 소년 심맥부지를 이듬해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으로 봅니다.
천전리의 신라 명문 전체를 '신라 지배층의 방명록'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명문 속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가득합니다. 가장 오래된 계사명(癸巳銘)은 513년(지증왕 14)에 새겨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고구려 관등인 '대형(大兄)'이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 453년(눌지왕 37)까지 올려 보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535년의 을묘명에는 당시 임금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 부른 대목이 있어, '법흥'이 죽은 뒤 붙인 시호가 아니라 생전부터 쓰이던 호칭임을 보여 줍니다. 543년 무렵의 계해명은 조덕도라는 여성이 홀로 나들이 와서 남긴 글인데, 이곳이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신성 구역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린 명소였음을 알려 줍니다.
김유신의 동생 흠춘, 훗날의 문무왕을 떠올리게 하는 '법민랑' 같은 이름도 보이고, 영랑이라는 인물이 "목표한 바를 이루었다(成業)"고 새긴 글은 이 계곡이 화랑의 수련 장소였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838년의 한 명문은 이 바위를 '문암(文巖)', 곧 글바위라 부르며 구경하러 왔다고 적었습니다. 여기에 명문 곳곳에 등장하는 관직명과 6부 체제에 관한 언급은 6세기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단순한 선사 암각화가 아닙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상징 문양과 동물, 인물을 새긴 바위가, 수천 년 뒤 신라 왕실과 지배층이 찾아와 글과 그림을 남기는 장소로 다시 사용된 것입니다. 선사시대의 상징 세계와 신라시대의 역사 기록이 한 바위 위에 겹쳐진, 복합적 성격의 국가유산인 셈입니다.
반구천 암각화 VR 보기
4. 보존의 어려움
반구천 암각화의 가치는 높지만, 보존 문제는 여전히 무겁습니다. 특히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발견되기 6년 전인 1965년에 하류에 사연댐이 완공되면서, 세상에 알려질 때부터 이미 물에 잠기는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암각화는 해발 53~57m 지점에 있어 댐 수위가 오르면 물에 잠기고 갈수기에 다시 드러나는데, 이런 침수와 노출의 반복은 무른 셰일 계열의 바위면에 풍화를 재촉합니다.
다행히 2021년 정부는 사연댐에 폭 15m의 수문 3개를 설치해 수위를 낮추기로 결정했고, 2030년까지 공사를 마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댐 수위를 낮추면 울산의 식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대체 수자원 확보라는 과제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사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암반 변위계 설치와 정기 촬영 등을 통해 암각화의 상태를 계속 점검하고 있습니다.
5.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반구천의 암각화」는 202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국제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반구천의 암각화가 동아시아 연안 지역 한반도 사람들이 다양한 주제를 높은 수준으로 묘사한 그림이며, 특히 다양한 고래와 고래잡이 과정의 주요 단계를 담은 희소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점은 두 유산이 서로 같은 성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곡리는 바다와 육지의 생명, 사냥과 포경, 공동체의 생업과 기원을 보여줍니다. 천전리는 기하학적 상징 문양과 신라 명문이 결합된 장소입니다. 이 두 유산이 함께 묶일 때, 반구천 암각화는 단순한 선사유적을 넘어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이어진 암각 전통과 장소 기억의 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구천 암각화가 세계유산이 되었다고 해서 보존의 과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더 정밀한 연구와 관리가 필요합니다.
대곡리 암각화는 침수와 노출의 반복 속에서 보존 대책이 계속 요구되고,
천전리 암각화는 선사 문양과 신라 명문이 겹친 복합 유산인 만큼 해석과 안내가 더 정교해져야 합니다.
첫째, 대곡리와 천전리를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고 각각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암각화의 도상을 단순한 그림으로 소비하지 않고, 생업·의례·상징·기억의 층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셋째, 세계유산 등재를 관광 홍보의 성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장기적 보존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반구천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에 새긴 소망이자, 신라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 기억을 남긴 장소입니다.
대곡리에는 바다와 육지의 생명이 새겨져 있고, 천전리에는 기하학적 상징과 신라의 시간이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반구천 암각화는 “오래된 그림”이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이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고 기억해 온 방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울산 울주군 반구천 일원에는 한국 선사미술을 대표하는 두 유산이 나란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다른 하나는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입니다. 두 유산은 2025년 7월 「반구천의 암각화」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보유한 열일곱 번째 세계유산이자, 바위에 새긴 그림으로는 첫 번째 세계유산입니다. 그렇다면 이 오래된 바위그림은 왜 세계의 인정을 받았을까요? 등재 1주년을 맞은 지금, 반구천의 암각화가 어떤 유산인지 차근차근 들여다보려 합니다.
1. 반구천 암각화의 발견
반구천 암각화의 발견은 1970년대 초반 한국 선사미술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뜻밖에도 불교 유적 조사였습니다. 1970년 12월 24일, 동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반고사(盤皐寺) 터를 찾아 반구대 일대를 답사하던 중, 마을 주민의 제보로 천전리의 바위그림을 발견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암각화가 학계에 처음 보고된 순간이었고, 이 유산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71년 12월 25일, 천전리를 다시 조사하던 조사단은 역시 주민의 도움을 받아 대곡천 하류 쪽 절벽에서 또 하나의 바위그림을 찾아냅니다. 바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입니다. 두 해 연속 성탄절 무렵에 이루어진 발견이었으니, 한국 고고학이 받은 보기 드문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셈입니다.
두 유산은 성격이 뚜렷하게 다릅니다. 대곡리 암각화에는 사람, 고래, 거북, 배, 그물,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 자연주의적 형상이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어, 기하학적 문양 중심의 천전리 암각화와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2.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바다와 육지 생명의 기록
반구천 암각화의 한 축을 이루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의 수직 절벽 아래쪽 암반에 새겨져 있습니다. 세계유산 등재 자료 기준으로 너비 약 8m, 높이 약 4.5m의 중심 암면과 주변 10곳의 바위면에 312점 정도의 그림이 확인되며, 1995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다만 그림 수는 미세한 새김 자국을 어디까지 셀 것인지에 따라 조사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울산반구대암각화 일러스트 도면, 울산암각화박물관
(사진 출처 : 이뮤지엄)
이 바위에서 구분되는 동물만 약 20여 종입니다. 고래, 거북, 바다사자, 상어 같은 바다동물부터 사슴,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너구리, 멧돼지 같은 육지동물까지, 마치 도감 한 권을 펼쳐 놓은 듯합니다. 한 연구자는 '인류 최초의 야생동물 분류 도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평가하기도 한 만큼 한반도의 식생을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특히 고래 그림이 압권입니다. 연구자들은 물을 뿜는 모양(분기 형태), 배 주름의 유무, 지느러미와 머리의 생김새 같은 형태학적 기준으로 고래의 종까지 가려냈습니다. 등재 자료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 향고래, 들쇠고래, 범고래, 상괭이 등 최소 7종으로 소개하는데, 참고래를 판별 목록에 넣는 연구자도 있어 세부 종에는 견해 차이가 조금씩 있습니다.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는 귀신고래의 습성, 물 위로 힘차게 뛰어오르는 혹등고래, 작살을 맞고 몸통을 비트는 고래, 부구(浮具)가 달린 줄, 여러 사람이 올라탄 배까지. 고래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새길 수 없는 장면들입니다.
(사진 출처 : 이뮤지엄)
울산반구대암각화 암면 세부
(혹등고래의 브리칭 장면)
울산반구대암각화 암면 세부
(새끼와 함께 유영하는 귀신고래)
재미있는 것은 이 그림들이 '계절'까지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연구에서는 새끼를 업은 어미 고래, 겨울잠에서 깨어나 짝짓기하는 너구리, 알을 낳으러 뭍으로 오르는 바다거북, 갓 태어난 줄무늬 새끼 멧돼지로 해석하여 관찰되는 장면에서 계절성을 읽어 냈습니다. 이러한 해석을 토대로 계절에 따라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고래잡이 철에 다시 모여 결속과 동족의식을 다지던 공동 의례의 산물로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림 속 배에는 많게는 17명 가량이 타고 있어 고래잡이가 여러 집단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언제 새겨졌을까요? 사실 여기에는 지금도 진행 중인 학술 논쟁이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울산 황성동 유적에서 나온 작살(골촉)이 박힌 고래 뼈, 인근 세죽 패총에서 나온 동물 뼈의 구성이 암각화 속 동물들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약 6,400~5,500년 전), 그리고 유적 어디에도 농경과 관련된 그림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반면 청동기시대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암각화가 실제로 유행한 시기는 청동기시대이고, 논쟁이 되는 두 암각화를 빼면 신석기시대 암각화가 확인된 예가 없으며, 반구천 주변 20km 안의 청동기시대 유적 밀집도가 신석기시대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높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는 신석기시대에 제작이 시작되어 오랜 기간 이어졌다는 관점이 채택되었지만, 편년 논쟁 자체는 여전히 열려 있는 셈입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이곳에 농경이 아니라 수렵·어로의 세계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 그림이 있는 유적"이라는 단순한 설명을 넘어섭니다. 이곳에는 바다를 관찰한 눈, 동물의 움직임과 계절을 읽는 감각, 사냥과 어로에 의존했던 공동체의 삶과 의례가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3.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기하학 문양과 신라 문화가 겹친 장소
반구천 암각화를 이야기할 때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만 떠올리기 쉽지만, 거기서 물길을 따라 약 2km 상류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유산이 있습니다. 바로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입니다. 오랫동안 '천전리 각석'으로 불리다가, 명문과 암각화의 가치를 함께 드러내기 위해 2024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곳의 핵심은 기하학적 문양, 동물과 인물, 그리고 신라시대 명문이 한 바위면 위에 함께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너비 약 9.8m, 높이 약 2.7m의 중심 암면과 주변 바위면에 620여 점의 그림과 문자가 확인됩니다.
울산천전리명문과암각화 일러스트 도면, 울산 암각화 박물관
(사진 출처 : 이뮤지엄)
바위면은 크게 위아래 층위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윗부분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마름모, 동심원, 물결, 나선에 가까운 문양과 동물, 추상화된 인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하문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천전리에서 확인된 동물 그림만 사슴류를 중심으로 224점에 이릅니다. 문양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나와 있습니다. 동심원무늬는 태양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다수이지만 달이나 강물의 파문, 물과 농경의 상징으로 읽는 견해도 있고, 마름모무늬는 여성의 몸과 출산, 다산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연구가 많습니다.
다만 문헌 기록이 없는 시대의 산물이기에 개별 문양의 의미를 하나하나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재로서는 자연과 생명, 풍요와 의례를 담은 '기하학적 상징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기하문을 청동기시대 산물로 보는 데 학계의 이견이 크지 않고, 동물 그림까지 포함해 전체를 청동기시대로 보는 견해와 신석기시대까지 올려 보는 견해가 병존합니다. 이곳이 처음에는 수렵 의례의 장소였다가, 기하문이 새겨지는 단계에 이르러 풍요와 다산, 조상 숭배까지 아우르는 공동체 통합 의례의 장소로 성격이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아랫부분에는 가는 선으로 그어 새긴 기마행렬과 배, 용, 그리고 명문이 남아 있습니다. 정밀 판독을 통해 확인된 명문만 200개가 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입니다.
원명에 따르면 525년(법흥왕 12),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이 일행과 함께 이 골짜기에 놀러 왔다가, 글을 새기기 좋은 바위를 발견하고는 이곳에 '서석곡(書石谷)', 곧 '글 쓰는 돌의 골짜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원명이 새겨진 자리에는 원래 말 그림이 있었는데 그 일부를 갈아내고 글을 새긴 흔적이 확인됩니다. 서석곡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이 찾아와 흔적을 남기던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4년 뒤인 539년, 이미 세상을 떠난 갈문왕을 그리워하며 부인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가 어린 아들과 함께 새벽에 이곳을 다시 찾아 그 사연을 바위에 새겼습니다. 학계에서는 이때 어머니 손을 잡고 온 소년 심맥부지를 이듬해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으로 봅니다.
천전리의 신라 명문 전체를 '신라 지배층의 방명록'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명문 속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가득합니다. 가장 오래된 계사명(癸巳銘)은 513년(지증왕 14)에 새겨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고구려 관등인 '대형(大兄)'이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 453년(눌지왕 37)까지 올려 보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535년의 을묘명에는 당시 임금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 부른 대목이 있어, '법흥'이 죽은 뒤 붙인 시호가 아니라 생전부터 쓰이던 호칭임을 보여 줍니다. 543년 무렵의 계해명은 조덕도라는 여성이 홀로 나들이 와서 남긴 글인데, 이곳이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신성 구역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린 명소였음을 알려 줍니다.
김유신의 동생 흠춘, 훗날의 문무왕을 떠올리게 하는 '법민랑' 같은 이름도 보이고, 영랑이라는 인물이 "목표한 바를 이루었다(成業)"고 새긴 글은 이 계곡이 화랑의 수련 장소였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838년의 한 명문은 이 바위를 '문암(文巖)', 곧 글바위라 부르며 구경하러 왔다고 적었습니다. 여기에 명문 곳곳에 등장하는 관직명과 6부 체제에 관한 언급은 6세기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단순한 선사 암각화가 아닙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상징 문양과 동물, 인물을 새긴 바위가, 수천 년 뒤 신라 왕실과 지배층이 찾아와 글과 그림을 남기는 장소로 다시 사용된 것입니다. 선사시대의 상징 세계와 신라시대의 역사 기록이 한 바위 위에 겹쳐진, 복합적 성격의 국가유산인 셈입니다.
반구천 암각화 VR 보기
4. 보존의 어려움
반구천 암각화의 가치는 높지만, 보존 문제는 여전히 무겁습니다. 특히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발견되기 6년 전인 1965년에 하류에 사연댐이 완공되면서, 세상에 알려질 때부터 이미 물에 잠기는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암각화는 해발 53~57m 지점에 있어 댐 수위가 오르면 물에 잠기고 갈수기에 다시 드러나는데, 이런 침수와 노출의 반복은 무른 셰일 계열의 바위면에 풍화를 재촉합니다.
다행히 2021년 정부는 사연댐에 폭 15m의 수문 3개를 설치해 수위를 낮추기로 결정했고, 2030년까지 공사를 마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댐 수위를 낮추면 울산의 식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대체 수자원 확보라는 과제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사이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암반 변위계 설치와 정기 촬영 등을 통해 암각화의 상태를 계속 점검하고 있습니다.
5.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반구천의 암각화」는 202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국제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반구천의 암각화가 동아시아 연안 지역 한반도 사람들이 다양한 주제를 높은 수준으로 묘사한 그림이며, 특히 다양한 고래와 고래잡이 과정의 주요 단계를 담은 희소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점은 두 유산이 서로 같은 성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곡리는 바다와 육지의 생명, 사냥과 포경, 공동체의 생업과 기원을 보여줍니다. 천전리는 기하학적 상징 문양과 신라 명문이 결합된 장소입니다. 이 두 유산이 함께 묶일 때, 반구천 암각화는 단순한 선사유적을 넘어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이어진 암각 전통과 장소 기억의 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6.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구천 암각화가 세계유산이 되었다고 해서 보존의 과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더 정밀한 연구와 관리가 필요합니다.
대곡리 암각화는 침수와 노출의 반복 속에서 보존 대책이 계속 요구되고,
천전리 암각화는 선사 문양과 신라 명문이 겹친 복합 유산인 만큼 해석과 안내가 더 정교해져야 합니다.
첫째, 대곡리와 천전리를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고 각각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암각화의 도상을 단순한 그림으로 소비하지 않고, 생업·의례·상징·기억의 층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셋째, 세계유산 등재를 관광 홍보의 성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장기적 보존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반구천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에 새긴 소망이자, 신라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 기억을 남긴 장소입니다.
대곡리에는 바다와 육지의 생명이 새겨져 있고, 천전리에는 기하학적 상징과 신라의 시간이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반구천 암각화는 “오래된 그림”이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이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고 기억해 온 방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