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시작하며: 한 사람을 보는 시선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왕 중 한 사람입니다. 그가 매일 무엇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남아 있습니다.
첫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왕이 죽은 뒤 사관(史官)이 정리한 공식 역사서.
둘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매일 그날의 일을 받아 적은 행정 기록.
셋째, 『일성록(日省錄)』 - 일기 형식 기록에서 국정운영 기록으로 정비한 왕실 기.
앞의 세 종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조선왕조실록』 1997년, 『승정원일기』 2001년, 『일성록』 2011년 등재). 이 기록은 모두 정조라는 한 인물이 다루고 있지만, 누가 기록했는지, 언제 정리되었는지, 어떤 목적에서 작성되었는지에 따라 정조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게 묘사됩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기록이 존재하는데, 같은 정조라 하더라도 기록 속 모습은 마치 여러 화가가 각기 다른 자리에서 그린 초상화처럼 서로 다른 결을 지닙니다.
이번 문화유산 추천에서는 기록물을 중심으로 정조를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 
| 
|
조선왕조실록, 정족산 사고본 | 승정원일기,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사진출처 : 국가유산청) | 일성록,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II. 첫 번째 장면 - 즉위 첫날의 한마디 (1776년 3월 10일)
1. 무슨 일이 있었나
영조가 1776년 3월 5일 승하했습니다. 닷새 뒤인 3월 10일, 25세의 세손이 새 임금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영조가 안치된 빈전(殯殿) 앞에서 정조는 대신들을 불러놓고 첫 명령을 내렸는데 그 첫마디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윤음하기를,“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下綸音曰: "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先大王爲宗統之重, 命予嗣孝章世子, 嗚呼! 前日上章於先大王者, 大可見不貳本之予意也。)
-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3월 10일 신사
하교하기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막중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이으라고 명하셨다. 아, 전일에 선대왕에게 올린 글에서 근본(根本)을 둘로 할 수 없다는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敎曰。鳴呼。寡人 思悼世子之子也。 先大王爲宗統之重。 命予嗣 孝章世子。鳴呼。前曰上章於 先大王者。大可見不貳本之予意也。 )
- 『일성록』 , 정조 즉위년 병신(1776) 3월 10일 신사
14년 전(1762) 영조가 자기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영조는 '앞으로 사도세자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못 박았고, 1764년(영조 40) 2월에는 정조를 일찍 죽은 효장세자(孝章世子, 영조의 첫째 아들, 1719~1728)의 양자로 입적(立後)시켜 왕통을 잇도록 하였습니다. 즉 공식적으로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이 되어 왕위를 받은 것입니다. 영조가 이 입후 조치를 통해 세운 원칙이 곧 '임오의리(壬午義理)', 임오년의 처분은 종묘사직을 위한 부득이한 결단이었으며, 이를 번복하려는 자는 누구든 역적으로 다스린다는 정치적 대전제였습니다. 그런 정조가 즉위 첫날 입을 열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것은 큰 화두가 될 만한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이 발언은 종종 정조가 노론(老論)을 향해 던진 경고처럼 인용되기도 합니다. ‘내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의 복수 선언처럼 말이죠. 그러나 실록 원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정조의 발언은 그 한 줄에서 끝나지 않고, 곧바로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내용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어 정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제사는 왕실 예법이 아닌 일반 사대부의 예법을 따를 것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대비와 같은 대우를 받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게 됩니다.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하지 않겠다고 못 박은 것입니다.
같은 날 정조는 임오화변을 조장한 김상로(金尙魯)의 관작을 추탈하고, 그 아들 김치현(金致顯), 숙의 문씨(淑儀文氏)와 동생 문성국(文聖國) 등도 함께 처벌하였습니다. 즉 즉위 첫날의 윤음은 ‘공적인 의리는 영조의 처분 그대로 유지하되, 임오화변을 적극적으로 조장한 자들은 단죄한다’는 이중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사도세자 추숭 자체를 거부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조가 분명히 한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추숭을 거론하는 것은 영조의 대의리(大義理)를 번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과 새 정권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정조 즉위 직후 1776년 4월 1일, 전 승지 이덕사(李德師)·해미 유생 이일화(李一和)·전 장령 유한신(柳翰申)이 사도세자의 원통함을 풀고 임오화변의 역적을 토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잇따라 올렸습니다. 정조는 이들을 즉각 친국(親鞫)하여 4월 5일까지 모두 대역부도(大逆不道)·무상부도(誣上不道)로 처형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와주(窩主)로 지목된 인물은 효장세자빈 풍양 조씨의 사촌이자 소론 인물인 조재한(趙載翰)이었고, 한광계(韓光綮)·최재흥(崔載興)·박상로(朴相老) 등 소론 세력이 깊이 연루되었습니다. 특히 조재한은 세손 시절 환관 김수현(金壽賢)·이흥록(李興祿)과 결탁하여 사도세자 추숭을 권유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 8월 6일에는 영남 안동 유생 이도현(李道顯)·이응원(李應元) 부자가 다시 사도세자 신원(伸冤) 상소를 올렸다가 역시 대역부도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즉 정조 즉위년에 사도세자 신원을 요구하다 처형된 사건은 두 차례였고, 1차(4월)는 소론, 2차(8월)는 영남 남인 계열이 주도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정조는 즉위 첫 윤음으로 ‘공적 의리’와 ‘사적 효심’의 경계를 분명히 그었고, 이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은 정파를 불문하고 단죄했습니다. 따라서 즉위 첫날의 한마디는 다음 두 해석을 모두 포함하는 복합적 발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가) 안정화 선언설: 즉위 첫날 영조의 유지를 명시적으로 계승함으로써 노론을 안심시킨 정치적 선언이라는 해석.
(나) 이중 메시지설: 표면적으로는 영조의 유지를 따른다고 했지만, 즉위 첫 윤음의 첫 줄에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말을 일부러 배치한 것 자체가 신하들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보낸 수사였다는 해석.
두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한 줄만 떼어내어 정조의 복수 선언으로 읽는 것은 사료 맥락에서 벗어난 독해라는 점입니다. 이제 사도세자와 정조의 관계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III . 두 번째 장면 - 사도세자의 그림자와 정조가 지운 한 페이지
1. 임오화변, 11세 세손이 본 아버지의 죽음
정조의 평생을 따라다닌 사건은 임오년(壬午年, 1762) 윤5월이었습니다. 11세의 세손이던 정조의 눈앞에서, 영조는 자기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폐서인(廢庶人, 평민으로 강등)으로 만들어 뒤주에 가두게 됩니다. 사도세자는 윤5월 13일(을해) 폐세자, 윤5월 21일(계미) 훙서로 8일 만에 죽음에 이릅니다. 이 사건이 임오화변(壬午禍變)입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처분의 직접적 계기가 영조 단독의 결단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및 38년 8월 26일 기록에 의하면, 영조 앞에서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映嬪 李氏)가 다음과 같이 청했습니다.
“소조(小朝, 사도세자)의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으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은 모자지간의 정리로 보아선 못할 일이지만,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편안히 하는 일이 옳으니 대처분(大處分)을 하소서. 부자의 정으로 차마 이러하시나, 병인 즉 병을 어찌 책망하리이까? 처분은 하오시나 은혜는 끼치시어 세손 모자를 편안케 하소서.”
- 『한중록』(혜경궁 홍씨)
즉 사도세자의 모친이 종묘사직을 위해 친아들에 대한 처분을 청한 직후 영조가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영조 vs 사도세자’의 단순한 부자 갈등으로 보기보다는, 영빈 이씨의 고변과 종묘사직의 논리가 결합된 정치적 사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임오화변의 비극성과 정치적 무게를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점입니다.
영조는 사건 직후 신하들에게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앞으로 누구든 이 일을 다시 거론하면 역적으로 다스리겠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죽은 윤5월 21일 당일에 영조는 “내가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의 은의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세자의 호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그 시호를 ‘사도(思悼)’라 한다”고 하교하였습니다.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 복제(服制)의 개월 수가 비록 있으나 성복(成服)은 제하고 오모(烏帽)·참포(黲袍)로 하며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한 달에 마치라. 세손은 비록 3년을 마쳐야 하나 진현(進見)할 때와 장례 후에는 담복(淡服)으로 하라."
『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약 두 달 뒤인 7월 23일, 영조는 직접 사도세자의 묘 앞에서 어제사도세자묘지(御製思悼世子墓誌)를 지어 묘에 묻었습니다. 영조는 한참을 써 내려가다 세자가 죽은 대목에 이르러 ‘차마 더는 쓸 수가 없다’고 하면서 붓을 멈추고 신하에게 대필하게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묘지의 끝에는 “乃復舊號特賜諡曰思悼”(이에 옛 호를 회복하고 특별히 시호를 ‘사도’라 내린다)라는 구절이 명시되어 있어, 시호 ‘사도’는 영조 본인이 직접 지어 내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정조가 평생에 걸쳐 진행한 추숭 사업
정조는 즉위 후 평생에 걸쳐 단계적으로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추숭이 단지 시호와 묘호를 올리는 '문서상의 격상'에 그치지 않고, 사당·무덤·태실·온행 유적까지 사도세자와 관련된 모든 공간을 차례로 다시 지어 올린 '공간의 추숭'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사업은 의례서·의궤·도설·그림이라는 시각 자료의 거대한 묶음을 남겼습니다.
시기 | 내용 |
1776년 즉위년 | 시호 ‘장헌(莊獻)’ 추상 |
1776년 4월·8월 | 사도세자 신원·추숭 관련 상소를 올린 이덕사·이일화·유한신 등 처형 |
1789년(정조 13) 7월 |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 묘를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 |
1792년(정조 16) | 사도세자 추숭을 요구하는 만인소 접수 |
1795년(정조 19) 윤2월 |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 기념 을묘원행(乙卯園幸) |
흥미로운 점은 정조의 추숭이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약 2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세자를 함부로 거론하는 자는 처형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시호를 올리고 묘를 옮기고 거대 행차로 가시화했습니다. 1776년의 두 차례 신원소 처형과 1792년 영남 만인소 접수 사이에는 16년의 거리가 있는데, 그동안 정조가 왕권을 어떻게 안정시켜 갔는지를 살피면 이 ‘단계적 추숭’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 
|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에 따라 1785년 왕에 해당하는 태실가봉(胎室加封)으로 격상하여 난간석(欄干石) 등 석물을 추가로 설치함 |
3. 가장 결정적인 사실 - 정조가 직접 지운 페이지
이 두 번째 장면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료사적 사실은,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1762) 전후의 『승정원일기』 관련 기록이 현재 남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화재나 분실 때문이 아니라 기록 자체가 세초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초(洗草)란 기록된 종이를 물에 씻어 글자를 흘려보내는 절차입니다. 본래 세초는 실록 편찬이 끝난 뒤 그 초고(初稿)인 사초(史草)를 폐기하는 절차였지만, 이 경우는 다릅니다. 이미 완성된 행정 기록에서 특정 부분을 사후에 의도적으로 제거한 사례입니다.
이 일은 정조가 즉위하기 약 한 달 전, 1776년 2월 4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세손은 그날 수은묘(垂恩墓) 재실(齋室)에서 대신들을 소견한 뒤 영조에게 상소하여, “처분은 처분이고 애통한 것은 애통한 것이므로 세초가 처분에 방해되지 않으며, 국조의 전고(典故)는 모두 간첩(簡牒)에 실려 있으니 그날의 처분에 대한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청하였습니다. 영조는 “임오년의 처분은 종사를 위한 것이었으나, 수은(垂恩, 사도세자)에게는 차마 못할 일이었다”고 하교하며 세초를 허락하였고, 세손은 그날 즉시 실록(實錄)의 예에 따라 승지 1인과 주서 1인을 시켜 창의문 밖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를 단행하였습니다.
"이번에 하교한 것은 나라를 위하고 충자(沖子)를 위한 것이나,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비사(秘史)는 의논할 수 없더라도, 《정원일기(政院日記)》로 말하면 천인(賤人)들도 다 보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 것이다. 사도(思悼)가 어두운 가운데에서 알면 반드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유족(裕足)을 끼치는 뜻이겠는가? 비사가 이미 있으니 일기가 있고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오늘 시임(時任)·원임(原任)이 마침 입시(入侍)하였으므로 이미 하교하였다. 승지(承旨) 한 사람이 실록(實錄)의 예(例)에 따라 주서(注書) 한 사람과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하라. 내 마음은 종통(宗統)에 대하여 광명(光明)하나 이 일은 수은(垂恩)에게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이번 하교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무신년 의 흉도(凶徒)의 남은 무리로 엄히 징계할 것이다. 다들 반드시 이 말에 따르고 국법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영조실록』 52년 2월 4일
흔히 알려진 것처럼 세초가 단순히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8일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초는 다음 두 시기에 집중되었습니다.
① 영조 31~32년(1755~56) -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과 을해옥사(乙亥獄事) 관련 기록. 소론 윤지(尹志) 일파가 나주 객사에 영조를 비방하는 글을 붙인 사건과 그 후속 옥사로, 임오화변 이전 영조와 사도세자의 정치적 긴장이 누적되는 배경이 됩니다.
② 영조 37~38년(1761~62) - 사도세자의 평양 미행(微行) 사건과 임오화변 관련 기록.
즉 정조는 임오화변 8일간만이 아니라, 그 전조(前兆)가 되었던 정치적 옥사들과 사도세자가 영조 몰래 평양에 다녀온 '서로행역(西路行役)' 사건 기록까지 광범위하게 세초를 청한 것입니다. 평양 미행은 1761년 4월 2일부터 22일까지 약 20일에 걸쳐 이루어졌고, 임오화변에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할 때 제기한 핵심 죄목 중 하나였습니다.
왜 정조는 이런 부탁을 했을까요? 사료의 성격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실록은 왕이 죽기 전에는 편찬되지 않습니다.
- 『일성록』은 정조 본인이 만들고 결재할 수 있습니다.
- 『승정원일기』는 행정 1차 사료이므로 누구나 정쟁(政爭) 중에 확인이 가능합니다.
만약 임오화변 시기의 『승정원일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그 비참한 사건은 미래의 정쟁에서 끝없이 소환될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폐서인되던 그날의 의례 절차, 신하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기록되어 있을 행정 원본은 정조에게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명분이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실제로 정조 즉위 직후 4월에 이덕사·이일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친국 과정에서 임오화변에 관련된 인물·죄목·논의가 다시 거론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때 정조는 사건을 직접적 관련자에 한정해 신속히 종결하고, 사도세자 신원소 자체를 폐기하여 사건의 '기록상 흔적'을 최소화하였습니다. 즉위 한 달 전에 이미 행정 1차 사료를 정리해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대응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남습니다. 정조가 즉위 한 달 전에 미리 지운 것은 『승정원일기』라는 행정 기록의 종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울 수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임오화변 두 달 뒤 영조가 직접 구술해 백자청화에 새겨 양주 배봉산의 흙 속에 묻어둔 어제 묘지명입니다. 영조의 회한과 자책,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라는 두 번 반복된 문장, 사건의 날짜와 정황이 그대로 510자에 새겨진 이 1차 사료는 200년을 잠들어 있다가, 1968년에야 배봉산의 흙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조가 정치적 안정을 위해 행정 기록의 종이를 씻어냈다면, 영조는 자신의 회한을 백자 묘지에 새겨 흙 속에 묻었습니다. 정조가 지운 자리에서 영조의 글이 다시 떠올랐다는 사실은, '한 인물을 다룬 기록들이 서로 다르게 남는다'는 이 글의 출발점을 가장 극적으로 증언합니다.
I. 시작하며: 한 사람을 보는 시선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왕 중 한 사람입니다. 그가 매일 무엇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남아 있습니다.
첫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왕이 죽은 뒤 사관(史官)이 정리한 공식 역사서.
둘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매일 그날의 일을 받아 적은 행정 기록.
셋째, 『일성록(日省錄)』 - 일기 형식 기록에서 국정운영 기록으로 정비한 왕실 기.
앞의 세 종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조선왕조실록』 1997년, 『승정원일기』 2001년, 『일성록』 2011년 등재). 이 기록은 모두 정조라는 한 인물이 다루고 있지만, 누가 기록했는지, 언제 정리되었는지, 어떤 목적에서 작성되었는지에 따라 정조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게 묘사됩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기록이 존재하는데, 같은 정조라 하더라도 기록 속 모습은 마치 여러 화가가 각기 다른 자리에서 그린 초상화처럼 서로 다른 결을 지닙니다.
이번 문화유산 추천에서는 기록물을 중심으로 정조를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출처 : 국가유산청)
II. 첫 번째 장면 - 즉위 첫날의 한마디 (1776년 3월 10일)
1. 무슨 일이 있었나
영조가 1776년 3월 5일 승하했습니다. 닷새 뒤인 3월 10일, 25세의 세손이 새 임금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영조가 안치된 빈전(殯殿) 앞에서 정조는 대신들을 불러놓고 첫 명령을 내렸는데 그 첫마디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14년 전(1762) 영조가 자기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영조는 '앞으로 사도세자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못 박았고, 1764년(영조 40) 2월에는 정조를 일찍 죽은 효장세자(孝章世子, 영조의 첫째 아들, 1719~1728)의 양자로 입적(立後)시켜 왕통을 잇도록 하였습니다. 즉 공식적으로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아들이 되어 왕위를 받은 것입니다. 영조가 이 입후 조치를 통해 세운 원칙이 곧 '임오의리(壬午義理)', 임오년의 처분은 종묘사직을 위한 부득이한 결단이었으며, 이를 번복하려는 자는 누구든 역적으로 다스린다는 정치적 대전제였습니다. 그런 정조가 즉위 첫날 입을 열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것은 큰 화두가 될 만한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이 발언은 종종 정조가 노론(老論)을 향해 던진 경고처럼 인용되기도 합니다. ‘내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의 복수 선언처럼 말이죠. 그러나 실록 원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정조의 발언은 그 한 줄에서 끝나지 않고, 곧바로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내용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어 정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제사는 왕실 예법이 아닌 일반 사대부의 예법을 따를 것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대비와 같은 대우를 받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게 됩니다.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하지 않겠다고 못 박은 것입니다.
같은 날 정조는 임오화변을 조장한 김상로(金尙魯)의 관작을 추탈하고, 그 아들 김치현(金致顯), 숙의 문씨(淑儀文氏)와 동생 문성국(文聖國) 등도 함께 처벌하였습니다. 즉 즉위 첫날의 윤음은 ‘공적인 의리는 영조의 처분 그대로 유지하되, 임오화변을 적극적으로 조장한 자들은 단죄한다’는 이중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사도세자 추숭 자체를 거부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조가 분명히 한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추숭을 거론하는 것은 영조의 대의리(大義理)를 번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과 새 정권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정조 즉위 직후 1776년 4월 1일, 전 승지 이덕사(李德師)·해미 유생 이일화(李一和)·전 장령 유한신(柳翰申)이 사도세자의 원통함을 풀고 임오화변의 역적을 토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잇따라 올렸습니다. 정조는 이들을 즉각 친국(親鞫)하여 4월 5일까지 모두 대역부도(大逆不道)·무상부도(誣上不道)로 처형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와주(窩主)로 지목된 인물은 효장세자빈 풍양 조씨의 사촌이자 소론 인물인 조재한(趙載翰)이었고, 한광계(韓光綮)·최재흥(崔載興)·박상로(朴相老) 등 소론 세력이 깊이 연루되었습니다. 특히 조재한은 세손 시절 환관 김수현(金壽賢)·이흥록(李興祿)과 결탁하여 사도세자 추숭을 권유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 8월 6일에는 영남 안동 유생 이도현(李道顯)·이응원(李應元) 부자가 다시 사도세자 신원(伸冤) 상소를 올렸다가 역시 대역부도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즉 정조 즉위년에 사도세자 신원을 요구하다 처형된 사건은 두 차례였고, 1차(4월)는 소론, 2차(8월)는 영남 남인 계열이 주도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정조는 즉위 첫 윤음으로 ‘공적 의리’와 ‘사적 효심’의 경계를 분명히 그었고, 이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은 정파를 불문하고 단죄했습니다. 따라서 즉위 첫날의 한마디는 다음 두 해석을 모두 포함하는 복합적 발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두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한 줄만 떼어내어 정조의 복수 선언으로 읽는 것은 사료 맥락에서 벗어난 독해라는 점입니다. 이제 사도세자와 정조의 관계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III . 두 번째 장면 - 사도세자의 그림자와 정조가 지운 한 페이지
1. 임오화변, 11세 세손이 본 아버지의 죽음
정조의 평생을 따라다닌 사건은 임오년(壬午年, 1762) 윤5월이었습니다. 11세의 세손이던 정조의 눈앞에서, 영조는 자기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폐서인(廢庶人, 평민으로 강등)으로 만들어 뒤주에 가두게 됩니다. 사도세자는 윤5월 13일(을해) 폐세자, 윤5월 21일(계미) 훙서로 8일 만에 죽음에 이릅니다. 이 사건이 임오화변(壬午禍變)입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처분의 직접적 계기가 영조 단독의 결단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및 38년 8월 26일 기록에 의하면, 영조 앞에서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映嬪 李氏)가 다음과 같이 청했습니다.
즉 사도세자의 모친이 종묘사직을 위해 친아들에 대한 처분을 청한 직후 영조가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영조 vs 사도세자’의 단순한 부자 갈등으로 보기보다는, 영빈 이씨의 고변과 종묘사직의 논리가 결합된 정치적 사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임오화변의 비극성과 정치적 무게를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점입니다.
영조는 사건 직후 신하들에게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앞으로 누구든 이 일을 다시 거론하면 역적으로 다스리겠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죽은 윤5월 21일 당일에 영조는 “내가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의 은의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세자의 호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그 시호를 ‘사도(思悼)’라 한다”고 하교하였습니다.
약 두 달 뒤인 7월 23일, 영조는 직접 사도세자의 묘 앞에서 어제사도세자묘지(御製思悼世子墓誌)를 지어 묘에 묻었습니다. 영조는 한참을 써 내려가다 세자가 죽은 대목에 이르러 ‘차마 더는 쓸 수가 없다’고 하면서 붓을 멈추고 신하에게 대필하게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묘지의 끝에는 “乃復舊號特賜諡曰思悼”(이에 옛 호를 회복하고 특별히 시호를 ‘사도’라 내린다)라는 구절이 명시되어 있어, 시호 ‘사도’는 영조 본인이 직접 지어 내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정조가 평생에 걸쳐 진행한 추숭 사업
정조는 즉위 후 평생에 걸쳐 단계적으로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추숭이 단지 시호와 묘호를 올리는 '문서상의 격상'에 그치지 않고, 사당·무덤·태실·온행 유적까지 사도세자와 관련된 모든 공간을 차례로 다시 지어 올린 '공간의 추숭'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사업은 의례서·의궤·도설·그림이라는 시각 자료의 거대한 묶음을 남겼습니다.
시기
내용
1776년 즉위년
시호 ‘장헌(莊獻)’ 추상
1776년 4월·8월
사도세자 신원·추숭 관련 상소를 올린 이덕사·이일화·유한신 등 처형
1789년(정조 13) 7월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 묘를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
1792년(정조 16)
사도세자 추숭을 요구하는 만인소 접수
1795년(정조 19) 윤2월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 기념 을묘원행(乙卯園幸)
흥미로운 점은 정조의 추숭이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약 2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세자를 함부로 거론하는 자는 처형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시호를 올리고 묘를 옮기고 거대 행차로 가시화했습니다. 1776년의 두 차례 신원소 처형과 1792년 영남 만인소 접수 사이에는 16년의 거리가 있는데, 그동안 정조가 왕권을 어떻게 안정시켜 갔는지를 살피면 이 ‘단계적 추숭’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에 따라 1785년 왕에 해당하는 태실가봉(胎室加封)으로 격상하여 난간석(欄干石) 등 석물을 추가로 설치함
3. 가장 결정적인 사실 - 정조가 직접 지운 페이지
이 두 번째 장면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료사적 사실은,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1762) 전후의 『승정원일기』 관련 기록이 현재 남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화재나 분실 때문이 아니라 기록 자체가 세초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초(洗草)란 기록된 종이를 물에 씻어 글자를 흘려보내는 절차입니다. 본래 세초는 실록 편찬이 끝난 뒤 그 초고(初稿)인 사초(史草)를 폐기하는 절차였지만, 이 경우는 다릅니다. 이미 완성된 행정 기록에서 특정 부분을 사후에 의도적으로 제거한 사례입니다.
이 일은 정조가 즉위하기 약 한 달 전, 1776년 2월 4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세손은 그날 수은묘(垂恩墓) 재실(齋室)에서 대신들을 소견한 뒤 영조에게 상소하여, “처분은 처분이고 애통한 것은 애통한 것이므로 세초가 처분에 방해되지 않으며, 국조의 전고(典故)는 모두 간첩(簡牒)에 실려 있으니 그날의 처분에 대한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청하였습니다. 영조는 “임오년의 처분은 종사를 위한 것이었으나, 수은(垂恩, 사도세자)에게는 차마 못할 일이었다”고 하교하며 세초를 허락하였고, 세손은 그날 즉시 실록(實錄)의 예에 따라 승지 1인과 주서 1인을 시켜 창의문 밖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를 단행하였습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세초가 단순히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8일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초는 다음 두 시기에 집중되었습니다.
① 영조 31~32년(1755~56) -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과 을해옥사(乙亥獄事) 관련 기록. 소론 윤지(尹志) 일파가 나주 객사에 영조를 비방하는 글을 붙인 사건과 그 후속 옥사로, 임오화변 이전 영조와 사도세자의 정치적 긴장이 누적되는 배경이 됩니다.
② 영조 37~38년(1761~62) - 사도세자의 평양 미행(微行) 사건과 임오화변 관련 기록.
즉 정조는 임오화변 8일간만이 아니라, 그 전조(前兆)가 되었던 정치적 옥사들과 사도세자가 영조 몰래 평양에 다녀온 '서로행역(西路行役)' 사건 기록까지 광범위하게 세초를 청한 것입니다. 평양 미행은 1761년 4월 2일부터 22일까지 약 20일에 걸쳐 이루어졌고, 임오화변에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할 때 제기한 핵심 죄목 중 하나였습니다.
왜 정조는 이런 부탁을 했을까요? 사료의 성격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임오화변 시기의 『승정원일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그 비참한 사건은 미래의 정쟁에서 끝없이 소환될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폐서인되던 그날의 의례 절차, 신하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기록되어 있을 행정 원본은 정조에게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명분이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실제로 정조 즉위 직후 4월에 이덕사·이일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친국 과정에서 임오화변에 관련된 인물·죄목·논의가 다시 거론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때 정조는 사건을 직접적 관련자에 한정해 신속히 종결하고, 사도세자 신원소 자체를 폐기하여 사건의 '기록상 흔적'을 최소화하였습니다. 즉위 한 달 전에 이미 행정 1차 사료를 정리해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대응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남습니다. 정조가 즉위 한 달 전에 미리 지운 것은 『승정원일기』라는 행정 기록의 종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울 수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임오화변 두 달 뒤 영조가 직접 구술해 백자청화에 새겨 양주 배봉산의 흙 속에 묻어둔 어제 묘지명입니다. 영조의 회한과 자책,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라는 두 번 반복된 문장, 사건의 날짜와 정황이 그대로 510자에 새겨진 이 1차 사료는 200년을 잠들어 있다가, 1968년에야 배봉산의 흙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조가 정치적 안정을 위해 행정 기록의 종이를 씻어냈다면, 영조는 자신의 회한을 백자 묘지에 새겨 흙 속에 묻었습니다. 정조가 지운 자리에서 영조의 글이 다시 떠올랐다는 사실은, '한 인물을 다룬 기록들이 서로 다르게 남는다'는 이 글의 출발점을 가장 극적으로 증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