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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2023-08-30 17:50
호우총 청동기의 명문에서 井자와 十자 의 다른 해석
호우에 있는 十字는 시조를 고구려 제8대왕 新大王을 제1대로 하여 그 혈통의 이어지는 순서를 말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고구려 제1대 건국왕 추모왕이 있지만 고구려 왕계보에서 신대왕을 제1대로하여 면밀이 이어지는 독특한 것을 발견하여 글을 올려 봅니다. 신대왕의 후손을 적통으로 여기어 왕손을 이어가는 것이 고구려 멸망까지 왕손이 이어 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8대 신대왕( 벽고) 제1대 시조
제10대 산상왕(연우) 제2대 신대왕의 아들
제11대 동천왕(교체) 제3대 산상왕의 아들
제12대 중천왕 (연불) 제4대 동천왕의 아들
제13대 서천왕 (약로) 제5대 중천왕의 두째 아들
제14대 봉상왕 신대왕 적통이 아님 건너 뛰고,
돌고 ( 왕에 미즉위) 제6대 봉상왕이 자결 시킴
제15대 미천왕 (을불) 제7대 돌고의 아들
제16대 고국원왕(사유) 제8대 미천왕의 아들
제17대 소수림왕 신대왕 적통이 아님 건너 뛰고,
제18대 고국양왕( 이연) 제9대 고국원왕의 둘째 아들
제19대 광개토대왕 (담덕) 제10대 고국양왕의 아들
여기서 광개토대왕이 신대왕의 혈통 10대 손이 되므로 호우 명문에 " 十 "字는 뜻이 신대왕으로부터 10대손이란 뜻이 됩니다. 신대왕으로부터 적통 10대손이 됩니다.
제20대 장수왕 (거련) 제11대 광개토대왕의 맏아들
조다(助多) 제12대 장수왕의 아들 장수왕이 장수하는 바람에 왕에 즉위하
지 못함.
제21대 문자왕 (나은 ?) 제13대 조다(助多)의 아들 장수왕의 손자
제22대 안장왕 신대왕 적통이 아님 건너 뛰고,
제23대 안원왕 제14대 문자명왕의 아들
제24대 양원왕 제15대 안원왕의 장남
제25대 평원왕 제16대 양원왕의 장남
제26대 영양왕
제27대 영류왕 연개소문이 시해함
태양 또는 대양 제17대 미즉위 보장왕의 부친
제28대 보장왕 제18대 태양 혹 대양의 아들 /평원왕의 손자/ 보장욍이 부친 태양을 욍으
로 추봉함
평원왕의 손자이므로 신대왕의 적통 혈통임.
주몽왕으로부터 28대를 이어 온 왕계가끊어짐 고구려의 멸망. 또는 신대왕으로부터 이어 온 적통이 18대로 끓어짐.
제14대 고구려 봉상왕, 제17대 소수림왕, 제22대 안장왕 ,제26대영양왕, 제27대 영류왕은 신대왕의 적통에 끼지 못하며, 오직 신대왕 직계 혈통이 왕위를 이어져 갑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고구려 왕위 계승에 독특한 형상이 나타나서 적어 봅니다. 고구려 왕계보는 제1대 주몽왕부터 마지막 제28대 보장왕인데, 특이하게 제8대 신대왕의 자손으로 왕위 계승을 이어 가는데 독특합니다. 그래서 순서를 매겨보니 광개토대왕이 신대왕으로부터 10대손 왕이 됩니다. 호우에 새겨진 十자는 광개토대왕이 신대왕으로부터 열번째 왕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물 井 자는 천손(天孫)으로 해석합니다.
관련 용어
1.박혁거세의 羅井 羅乙
2.연개소문에서 " 淵 (연) " 이리카소미에서 "이리" 이리는 우물의 고어 이리, 을,
3.선덕여왕의 첨성대 상부 구조물이 우물 井자 형태 . 첨성대는 천문용이 아니고, 선덕여왕이 자손이 없어서
박혁거세의 나정처럼 첨성대를 세워 자손을 얻기 위해서 세운 건축물. 천손용 우물의 상징물.
호우에 있는 十字는 시조를 고구려 제8대왕 新大王을 제1대로 하여 그 혈통의 이어지는 순서를 말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고구려 제1대 건국왕 추모왕이 있지만 고구려 왕계보에서 신대왕을 제1대로하여 면밀이 이어지는 독특한 것을 발견하여 글을 올려 봅니다. 신대왕의 후손을 적통으로 여기어 왕손을 이어가는 것이 고구려 멸망까지 왕손이 이어 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8대 신대왕( 벽고) 제1대 시조
제10대 산상왕(연우) 제2대 신대왕의 아들
제11대 동천왕(교체) 제3대 산상왕의 아들
제12대 중천왕 (연불) 제4대 동천왕의 아들
제13대 서천왕 (약로) 제5대 중천왕의 두째 아들
제14대 봉상왕 신대왕 적통이 아님 건너 뛰고,
돌고 ( 왕에 미즉위) 제6대 봉상왕이 자결 시킴
제15대 미천왕 (을불) 제7대 돌고의 아들
제16대 고국원왕(사유) 제8대 미천왕의 아들
제17대 소수림왕 신대왕 적통이 아님 건너 뛰고,
제18대 고국양왕( 이연) 제9대 고국원왕의 둘째 아들
제19대 광개토대왕 (담덕) 제10대 고국양왕의 아들
여기서 광개토대왕이 신대왕의 혈통 10대 손이 되므로 호우 명문에 " 十 "字는 뜻이 신대왕으로부터 10대손이란 뜻이 됩니다. 신대왕으로부터 적통 10대손이 됩니다.
제20대 장수왕 (거련) 제11대 광개토대왕의 맏아들
조다(助多) 제12대 장수왕의 아들 장수왕이 장수하는 바람에 왕에 즉위하
지 못함.
제21대 문자왕 (나은 ?) 제13대 조다(助多)의 아들 장수왕의 손자
제22대 안장왕 신대왕 적통이 아님 건너 뛰고,
제23대 안원왕 제14대 문자명왕의 아들
제24대 양원왕 제15대 안원왕의 장남
제25대 평원왕 제16대 양원왕의 장남
제26대 영양왕
제27대 영류왕 연개소문이 시해함
태양 또는 대양 제17대 미즉위 보장왕의 부친
제28대 보장왕 제18대 태양 혹 대양의 아들 /평원왕의 손자/ 보장욍이 부친 태양을 욍으
로 추봉함
평원왕의 손자이므로 신대왕의 적통 혈통임.
주몽왕으로부터 28대를 이어 온 왕계가끊어짐 고구려의 멸망. 또는 신대왕으로부터 이어 온 적통이 18대로 끓어짐.
제14대 고구려 봉상왕, 제17대 소수림왕, 제22대 안장왕 ,제26대영양왕, 제27대 영류왕은 신대왕의 적통에 끼지 못하며, 오직 신대왕 직계 혈통이 왕위를 이어져 갑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고구려 왕위 계승에 독특한 형상이 나타나서 적어 봅니다. 고구려 왕계보는 제1대 주몽왕부터 마지막 제28대 보장왕인데, 특이하게 제8대 신대왕의 자손으로 왕위 계승을 이어 가는데 독특합니다. 그래서 순서를 매겨보니 광개토대왕이 신대왕으로부터 10대손 왕이 됩니다. 호우에 새겨진 十자는 광개토대왕이 신대왕으로부터 열번째 왕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물 井 자는 천손(天孫)으로 해석합니다.
관련 용어
1.박혁거세의 羅井 羅乙
2.연개소문에서 " 淵 (연) " 이리카소미에서 "이리" 이리는 우물의 고어 이리, 을,
3.선덕여왕의 첨성대 상부 구조물이 우물 井자 형태 . 첨성대는 천문용이 아니고, 선덕여왕이 자손이 없어서
박혁거세의 나정처럼 첨성대를 세워 자손을 얻기 위해서 세운 건축물. 천손용 우물의 상징물.
사단법인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2023-08-31 15:34
안녕하세요 강봉 선생님.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의 연구원 이명선입니다.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실제 고구려 초기 왕위 계승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연구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고구려 초기 연맹왕국이라는 특성 상 왕이 즉위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혈연 관계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대표적 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국천왕, 산상왕 대까지 형제 계승을 거쳐서 부자 계승으로 전환되어 연맹 왕국의 나부체제가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보기도 합니다. 분명한 건 선생님께서 이야기 해주신 태조왕 ~ 신대왕 사이에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전환기적인 성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차대왕이나 신대왕은 70세가 넘은 고령에 왕위에 올랐으며 중국 사서와 함께 비교하였을 때 이 왕위계승 과정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들이 확인됩니다. 여호규 선생님, 노태돈 선생님의 논문을 참조해보시면 해당 논점에 대한 시각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제시해주신 의견이 흥미로운 지점은 신대왕 전후로 왕위계승 관계가 변화한 점을 지적해주시고 계신 점입니다.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에서 혈연 관계가 확립된 왕계이며 이 계통은 계루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은 신대왕 이전의 시기에는 졸본 세력과 비류나부와 관련한 정치적 관계가 작용했을 것을 유추해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 재미있는 부분을 지적해주셨습니다만 고국천왕도 신대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설에 대한 부분이 다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해당 '十', '井'에 대한 해석이 아직 학계에서 논란이 있고 정확한 답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十'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해석될 때 한정판과 같이 직관적으로 그릇의 수로 해석한 바도 있고, 고대 발견되는 비슷한 명문 구조를 고려하여 도량형이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서진의 태강동부 명문도 '제작시점 + 제작 주체 및 제작물 + 번호'로 구성되어있습니다.
“太康三年八月六日, 右尙方造一斗銅釜, 重九斤七兩, 第一”
다른 의미일 수도 있으나 마지막 숫자가 대체로 수량, 도량형 등과 연관이 있어 후세 할 때 기준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井'의 경우는 신라의 우물 사례, 우물의 의미 등으로 해석한 내용도 있으나 실제 호우 그릇의 의미와 연결 되는가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명확한 해석과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어 설명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고구려 관련 학회에 여쭤보시면 보다 전문적이고 정확한 답변을 얻으실 수 있을 것으로 사료 됩니다.
짧은 식견으로 도움이 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의 연구원 이명선입니다.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실제 고구려 초기 왕위 계승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연구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고구려 초기 연맹왕국이라는 특성 상 왕이 즉위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혈연 관계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대표적 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국천왕, 산상왕 대까지 형제 계승을 거쳐서 부자 계승으로 전환되어 연맹 왕국의 나부체제가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보기도 합니다. 분명한 건 선생님께서 이야기 해주신 태조왕 ~ 신대왕 사이에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전환기적인 성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차대왕이나 신대왕은 70세가 넘은 고령에 왕위에 올랐으며 중국 사서와 함께 비교하였을 때 이 왕위계승 과정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들이 확인됩니다. 여호규 선생님, 노태돈 선생님의 논문을 참조해보시면 해당 논점에 대한 시각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제시해주신 의견이 흥미로운 지점은 신대왕 전후로 왕위계승 관계가 변화한 점을 지적해주시고 계신 점입니다.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에서 혈연 관계가 확립된 왕계이며 이 계통은 계루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은 신대왕 이전의 시기에는 졸본 세력과 비류나부와 관련한 정치적 관계가 작용했을 것을 유추해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 재미있는 부분을 지적해주셨습니다만 고국천왕도 신대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설에 대한 부분이 다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해당 '十', '井'에 대한 해석이 아직 학계에서 논란이 있고 정확한 답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十'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해석될 때 한정판과 같이 직관적으로 그릇의 수로 해석한 바도 있고, 고대 발견되는 비슷한 명문 구조를 고려하여 도량형이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서진의 태강동부 명문도 '제작시점 + 제작 주체 및 제작물 + 번호'로 구성되어있습니다.
“太康三年八月六日, 右尙方造一斗銅釜, 重九斤七兩, 第一”
다른 의미일 수도 있으나 마지막 숫자가 대체로 수량, 도량형 등과 연관이 있어 후세 할 때 기준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井'의 경우는 신라의 우물 사례, 우물의 의미 등으로 해석한 내용도 있으나 실제 호우 그릇의 의미와 연결 되는가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명확한 해석과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어 설명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고구려 관련 학회에 여쭤보시면 보다 전문적이고 정확한 답변을 얻으실 수 있을 것으로 사료 됩니다.
짧은 식견으로 도움이 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1946년 경주 시내에서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는 노서동 140호분에서 고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140호 고분은 봉분이 파괴가 많이 되었고 근처에 민가가 들어서 노서동 고분군을 발굴할 때 가장 먼저 발굴해야할 고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46년 140호분을 발굴한 결과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붙은 형태였고 남쪽 고분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청동 그릇이 발견되면서 호우총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북쪽 고분은 은방울이 출토되어 은령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1. 호우총에서 발견된 수수께끼의 청동 그릇
청동 그릇 밑 바닥에는 4행 4자씩 총 16자의 글씨를 기록해두었습니다.
글자의 의미를 해석하면
을묘년 /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 호우 / 십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은 시호이며, 광개토대왕이 재위한 시절에는 을묘년이 없기 때문에 청동 그릇에 기재한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의 서거한 412년 이후 을묘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청동 그릇에 쓰여진 글씨는 의미는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 혹은 추모하기 위한 호우 정도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청동 그릇이 제작된 을묘년은 언제일까하는 궁금증이 남습니다.
기존에 호우총은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 편년에서 가장 늦게 만들어진 형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우총에 들어간 이 청동 그릇의 하한 연대는 6세기 초 또는 6세기 전반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한편, 신라로 고구려 청동 그릇이 들어온 흔적을 추적해보면 기록 상에서 뚜렷한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적어도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을 준비하여 475년 백제 개로왕을 살해하는데 긴장감이 극에 달한 시기에 고구려와 신라가 우호의 선물을 주고 받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증거를 조금 더 고려해본다면 이 청동 그릇과 유사한 그릇이 언제 만들었는지를 고려해보는 것일 겁니다. 중국에서 소개된 자료에 의하면 보주형 꼭지가 있는 청동합은 중국 집안시 국내성 내 집안현, 마선구 940호분에서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특히 마선구 940호분은 적석총과 석실을 갖춘 봉토분의 전환기에 있던 것으로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중엽 사이에 제작된 그릇임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강현숙, 「고구려고분과 신라 적석목곽분 교편년에서의 몇 가지 논의」 ,
『한국상고사학보』87, 한국상고사학회, 2012, p. 86, <그림 1>)
호우총의 청동그릇은 415년 을묘년에 제작하여 신라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2. 호우총에서 발견된 청동 그릇의 의미
그렇다면 고구려에서 만든 그릇이 어떻게 신라 무덤에 묻히게 된 걸까요? 415년에 만들어진 청동 그릇이 6세기 초에서 6세기 전반에 조성된 호우총에 묻히게 된 것은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합니다.
415년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중요한 외교관계를 확인해보겠습니다. 내물왕의 아들인 실성왕과 복호가 신라 실성왕이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오는 내용이 『삼국사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볼모로 잡혀간 이유는 내물왕 치세에 왜가 침략했을 때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리치면서 고구려의 내정간섭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복호가 418년 신라로 돌아오면서 청동 그릇을 신라로 가져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는 점과 피장자의 착장 유물에 따른 위계를 보았을 때 방계나 서자가 호우총의 주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골품제를 유지하기 위해 신라 내에서는 성골 간 근친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감안하였을 때 호우총에 묻힌 사람은 복호의 직계이거나 복호의 자손이 눌지의 자손들과 혼인으로 엮이는 과정에서 호우총에 묻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로 볼 때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한 물건을 제작한 후 5세기 전반 지참하도록 하여 신라에 보내져 호우총에 같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조우연, 「"太王敎造" : 4~5세기 고구려 명문 기물 재검토」 , 『고구려발해학회』57, 고구려발해학회, 2017.
강현숙, 「고구려고분과 신라 적석목곽분 교편년에서의 몇 가지 논의」 , 『한국상고사학보』87, 한국상고사학회, 2012.
김용성, 「호우총의 구조 복원과 피장자 검토」 , 『선사와 고대』24, 한국고대학회, 2006.
참고 홈페이지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