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인간과 삶을 함께한 오리, 오리모양토기

202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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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소개해 드릴 문화유산은 오리모양토기입니다.

 오리모양토기(압형토기, 鴨形吐器)는 상형토기 중 오리의 모습을 닮은 토기를 말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새모양토기(조형토기, 鳥形吐器)라고도 말합니다. 상형토기는 인물이나 특정한 기물의 형상을 본떠 만든 토기로 삼국시대에 주로 유행하였습니다.

오리모양토기, 높이 15.3cm, 바닥 지름 7.0cm, 신라, 토제(경질), 국립중앙박물관, 증7043


 삼국시대의 상형토기는 외형은 실물을 따라서 만들었지만, 내부는 비어있는 형태로 제작되어 그릇처럼 액체를 담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외부에는 뿔잔이나 액체를 따를 수 있는 주구가 붙어있어서 잔이나 주전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제작하였습니다. 이런 상형토기는 일반적인 그릇과 다른 특이한 모양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의례를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형토기의 대부분은 무덤의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는데, 죽은 사람의 안식과 영혼의 승천처럼 사후세계에 대한 상징적인 기원을 표현한 것으로 장례와 같은 의례에서 사용한 후 매장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특수 용도로 제작되는 상형토기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동물 모양 중 새, 특히 오리의 형상을 한 것입니다. 왜 새 형상의 토기를 많이 만들었을까요?


 고대인들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거나, 봄에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준다는 조령신앙(鳥靈信仰)을 믿었습니다. 한반도에서도 청동기 시대에 발굴된 유물 중 새의 문양을 그려 넣은 유물들이 있고, 농경문 청동기 속에 사람이 농사를 짓는 모습과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함께 묘사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의 모습은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등장하는 원삼국시대의 소도와 소도 안에 세워졌던 솟대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농경의례와 연관된 모습을 보아 새는 예로부터 곡식을 물어다 주어 마을의 안녕과 풍요로움을 가져오고 하늘의 신과 땅의 주술사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변진조(弁辰條)의 기록에는 “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이용하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실제로 신라와 가야가 있었던 지역에서는 새의 깃털을 꽂아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칠기 부채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같은 지역권에서 오리모양토기와 새모양토기도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기 위해 새의 깃털과 오리모양토기를 만들어 함께 묻었던 변진한 사람들의 새와 관련한 장례 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령신앙’이 넓은 지역에 퍼져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농경문 청동기, 길이 13.5cm, 초기철기, 동합금,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1794
     ▲ 농경문 청동기 확대 이미지        

옻칠한 부채, 원삼국, 칠기, 국립김해박물관, 김해 79866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선단에 부채살을 꽃을수 있는 12개의 소공이 남아있다.


 많은 새의 종류 중 오리 모양이 많았던 것에는 낙동강 유역의 환경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강에 사는 오리는 물을 가져오거나 홍수를 막아주는 농경의 신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또 고대인들은 계절에 따라 머물렀다 떠나가는 철새로서의 오리의 행동이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인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제기를 만드는데 오리의 모습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리모양토기는 원삼국시대인 3시기 후반부터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도질토기(陶質土器)로 변화되었고 5세기경까지 낙동강 유역을 따라 확산되었습니다. 와질토기로 제작된 오리모양토기는 울산, 경산, 경주, 김해 등의 지역에서 출토되었고 도질토기로 제작된 오리모양토기는 달성, 안동, 창녕 등의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었습니다.

 오리모양토기의 기본적인 형태는 굽다리 위에 오리를 올려놓은 모습으로, 몸통 속이 비어있고 등 위에 잔의 주둥이 모양을 한 주입구를 붙이고 꼬리 쪽에는 구멍을 뚫어 주출구를 만든 형태입니다.

 초기의 오리모양토기는 머리에 큰 볏과 실제 오리에 가까운 형태와 묘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존하는 오리과의 동물 중 볏처럼 생긴 머리 깃을 가진 새들이 존재하고 멸종해서 지금은 볼 수 없는 과거의 오리 중 토기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볏이 있는 오리가 존재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현대의 오리는 대부분 동그란 머리를 가지고 있어 오리모양토기의 머리모양이 더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리모양토기의 모습에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머리의 볏은 작아지거나 없어지고, 몸체에 무늬를 넣거나 귀고리 등의 장신구가 추가되는 등 몸체가 좀 더 장식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리모양토기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와 기능은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습니다.

오리모양토기, 높이 29.5cm, 길이 30.1cm, 원삼국,
토제(와질), 국립진주박물관, 진주13

오리모양토기, 높이16.5, 높이15.5, 가야, 토제(경질),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1110

오리모양토기, 현재 높이 20.9cm, 삼국, 토제(경질),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92931


 오리모양토기는 오리가 물과 연관성이 있고 토기의 주입구와 주출구가 있는 모양새가 주자의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주자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오리모양토기가 주자보다는 등잔의 기능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등의 주입구에 등의 연료가 될 수 있는 기름을 넣고 주출구 부분에 심지를 꽂아 등불로 사용했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대로 오리모양토기를 등잔으로 사용했다면, 오리모양토기를 부장한 고대인들이 사후세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들은 사후세계를 어두컴컴한 미지의 세계로 보았을 것입니다. 죽은 자가 저승으로 이동할 때 오리모양토기의 불빛으로 더 안전하게 떠나길 바라며 오리모양토기를 제작해 함께 묻어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문헌

민병근, 2013, 전기역사를 찾아서_73회 - 삼국시대, 등잔 추정 이형토기 - 오리모양토기 등잔 (2), 전기저널 Vol.- No.436, 대한전기협회, pp 10-11

박현상, 2017, 압형토기의 변천과 그 의미, 한신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하동협, 2021, 가야지역 출토 상형토기 연구, 인제대학교 일반대학원, 역사고고학과 석사학위논문

 

참고 홈페이지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6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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