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바위그림에서 조선의 백자까지
2025년 여름,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는 박물관 문화상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까치와 호랑이를 담은 배지가 품절됐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화면 속 캐릭터에 대한 호감이 옛 그림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의 관람객에게 호랑이는 위엄있는 맹수이면서, 가까이 두고 싶은 친근한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호랑이는 어떤 눈매와 자세를 지닐 때 무섭거나 친근하게 보일까요. 눈과 동공의 형태, 몸통의 무늬, 움직임의 기세를 뜻하는 동세를 따라 문화유산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위에 새긴 윤곽선 에서 출발해 무덤의 백호와 고려의 거울을 지나, 조선의 회화·민화와 필통·베개에 이르기까지 호랑이의 얼굴이 달라지는 이유를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1. 윤곽선과 줄무늬로 드러나는 선사시대의 몸짓
첫 목적지는 울산 반구대암각화입니다. 2025년 7월 12일 ‘반구천의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습니다. 긴 몸 안에 줄무늬가 반복되는 동물이, 오른쪽 아래에는 점무늬가 있는 동물이 보입니다. 외곽선이 머리와 몸통, 다리의 형태를 잡는다면 내부문양은 동물을 구별하는 단서가 됩니다.
호랑이 몸통의 가로 방향과 줄무늬가 새겨진 방향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긴 몸 안에 짧은 선들이 반복되면서 윤곽과 다른 리듬을 만듭니다. 이어 배 아래로 뻗은 다리의 간격과 꼬리의 방향을 따라가면, 동물을 식별하던 시선이 자세와 동세를 읽는 시선으로 옮겨 갑니다.
이처럼 선사시대의 호랑이는 얼굴의 세부 표정보다 몸의 윤곽과 문양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입체적인 털의 질감을 재현하지 않아도, 줄무늬와 네 다리의 배치만으로 동물의 특징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형상만으로 특정한 사냥 장면이나 제작자의 의도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호랑이의 신체 특징 중 무엇을 강조하고 생략했는지 살피는 편이 실제 표현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입니다.
2. 길게 뻗는 고구려 백호와 원을 따르는 고려의 호랑이
고구려 강서대묘의 백호에서는 몸의 비례가 크게 달라집니다. 아래 모사도를 보면 가늘고 긴목이 휘어 올라가고, 몸통에서 이어진 꼬리는 오른쪽 위로 길게 뻗습니다. 다리는 몸통에서 여러 방향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머리와 몸통을 잇는 곡선, 다리와 꼬리가 뻗는 방향을 함께 따라가면, 육중한 체구보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유연한 동세가 두드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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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대묘 서벽 백호 모사도>, K번 8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청동 호랑이문 거울>, 고려, 지름 10.1cm, 덕수 392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세부 장식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입 주변의 붉은색과 어깨 부근에서 휘감기는 장식적 선은 몸의 굴곡을 강조합니다. 반구대의 문양이 동물의 특징을 알아보는 단서였다면, 이 백호의 길어진 신체와 장식은 현실의 맹수에서 벗어난 신령한 인상을 만듭니다. 백호는 서쪽을 맡아 무덤을 수호하는 사신(四神)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려의 청동거울에서는 긴 몸이 원형 화면에 맞추어 굽어집니다. 지름 10.1cm인 거울의 문양 면에는 중앙의 꼭지를 사이에 두고 두 마리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위쪽 호랑이의 머리는 오른쪽에, 아래쪽 호랑이의 머리는 왼쪽에 있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합니다. 둥근 테두리를 따르는 등과 길게 휜 꼬리를 번갈아 보면, 시선도 자연스럽게 원을 따라 움직입니다.
두 유물은 모두 신체를 길게 표현하지만,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벽화의 백호는 다리와 꼬리를 바깥으로 펼치며 운동감을 확장합니다. 거울의 두 호랑이는 한정된 원 안에서 몸을 굽히고 서로 대응하는 배치를 이룹니다. 또한 종이에 옮긴 벽화의 색과 선에 비해, 거울에서는 도드라진 양각 문양의 높낮이와 그늘이 형태를 드러냅니다. 같은 호랑이라도 표현 재료와 화면의 형태가 달라지면 몸을 읽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무덤을 지키는 백호에서 생활용품을 장식한 호랑이로 옮겨 온 시선을, 이제 조선의 회화와 백자로 이어 보겠습니다. 신체의 비례와 문양에 더해, 눈매와 필선의 차이가 표정을 한층 풍부하게 드러냅니다.
3. 눈매와 필선이 빚어내는 조선의 표정
조선의 호랑이 그림에서는 먼저 얼굴을, 다음에는 발과 꼬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세 작품은 사실적인 털 묘사와 과장된 비례가 여러 방식으로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민화 역시 회화의 한 갈래입니다. 두 범주를 갈라 놓기보다, 같은 호랑이 도상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변주되는 데 주목해 보겠습니다.
〈용맹한 호랑이〉는 눈 위쪽 윤곽이 낮게 눌려 있고 동공은 세로로 길쭉합니다. 낮춘 머리와 엇갈린 앞발은 앞으로 다가오는 긴장감을 만듭니다. 세필, 곧 가는 붓으로 촘촘히 묘사한 털 위에 굵은 줄무늬가 몸의 굴곡을 따라 휘어집니다. 필선의 밀도와 무늬의 곡률이 체구의 양감, 즉 부피감을 드러냅니다. 가운데 〈호랑이〉는 둥근 눈과 작은 원형 동공, 높이 솟은 등이 먼저 눈길을 끕니다. 앞발은 나란히 모이고 꼬리는 발 앞을 낮게 가로지릅니다. 첫 그림의 전진하는 기세에 비해, 동그랗게 몸을 모은 채 멈칫한 듯한 인상이 강합니다. 이 그림에도 가는 털 묘사는 남아 있습니다. 익살은 묘사의 부족보다 비례와 자세의 차이에서 생겨납니다.
민화의 까치호랑이 도상을 보여 주는 〈호랑이와 까치〉에서는 송곳니를 드러낸 입과 크게 벌린 눈이 공존합니다. 굵은 줄무늬가 몸을 감싸고, 위로 길게 치솟은 꼬리는 소나무 가지 사이를 가릅니다. 작은 까치 두 마리와 화면을 차지한 큰 호랑이의 대비도 흥미롭습니다. 이빨만 보면 사납지만 얼굴 전체와 새의 크기를 함께 보면 어딘가 과장된 연극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중·후기 호도 연구는 전문 화가의 그림과 민화 사이에서 도상이 이어지고 변형된 양상을 다룹니다. 세 작품을 정교함이 사라지는 순서로 나열하기보다, 날카로운 눈·둥근 눈·과장된 눈이 각각 어떤 감정을 불러오는지 비교하는 편이 풍성한 감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4. 백자 필통과 베개, 생활 속으로 들어온 호랑이
그림에서 눈을 맞춘 호랑이가 이번에는 책상과 잠자리 가까이 다가옵니다. 붓으로 그린 형상은 백자 표면의 채색과 양각으로, 다시 직물의 자수로 옮겨 갑니다. 재료가 달라질 때 눈과 입, 줄무늬를 표현하는 방식도 조금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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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작호문호> 조선 18세기, 높이 42.5cm, 국립경주박물관 (사진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 <백자 청화 양각 철화 송호문필통>, 조선, 높이 13.3cm, 국립중앙박물관 | <침식>, 섬유, 지름 19.6cm, 국립중앙박물관 |
18세기 〈백자 까치 호랑이 무늬 항아리〉는 오른쪽 높은 가지의 까치와 왼쪽 아래 호랑이가 사선으로 마주 놓입니다. 입구 아래와 몸통 하단의 문양 띠는 가운데 장면을 감쌉니다. 푸른 청화의 농담, 곧 짙고 옅음과 흰 여백이 형태를 구분하는 가운데, 몸에는 속이 빈 환형 반점과 줄무늬가 함께 나타납니다. 조선 백자에서 호랑이와 표범의 표현이 혼용된 예입니다. 필통에서는 얼굴이 표면 앞으로 도드라집니다. 양각으로 솟은 둥근 눈과 코, 길게 휘어진 입선이 빛과 그늘을 받아 표정을 만듭니다. 푸른 청화와 갈색 계열 철화가 줄무늬와 반점을 나누어 장식하고, 굽힌 다리는 원통의 아래쪽을 따라 놓입니다.
항아리의 호랑이가 흰 바탕 위에 그려진 장면이라면, 필통의 호랑이는 둥근 기벽에 몸을 붙이고 우리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베개에서는 감상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집니다. 베갯모는 베개 양 끝에 붙이는 장식입니다. 사진의 두 원형 장식은 짙은 테두리 안에 호랑이 문양을 담았습니다. 넓은 회화 화면과 달리, 작은 원 안에 형상을 모으고 경계를 두른 구성이 두드러집니다. 먹의 농담이나 도자의 요철을 보던 시선이 이제 실로 채운 색면과 문양의 배치로 옮겨 갑니다.
호랑이를 잠자리 곁에 둔 마음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무서운 짐승의 힘에 기대면서도 그 모습을 매일 가까이 두었던 것입니다. 귀여운 표정과 든든한 보호자의 역할은 이렇게 한 물건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5. 우리 곁에 머무는 호랑이의 여러 얼굴
조선 후기 백자 연구에서는 18세기의 세밀한 털 묘사와 함께, 19세기 일부 예에서 길어진 몸통과 커진 머리, 간략해진 표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태의 생략과 비례의 과장은 새로운 표정을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회화·민화·필통·베갯모를 함께 보면, 이러한 조형의 변화가 재료와 쓰임에 따라 얼마나 다채롭게 펼쳐졌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는 맹수이면서 보호하는 존재, 은혜를 갚는 동물이면서 어리석은 동물이 기도 했습니다.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와 해학적인 표정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사시대의 무서운 호랑이가 조선의 귀여운 호랑이로 변했다고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시대에도 용맹함과 익살, 두려움과 친근함이 겹쳐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호랑이에게 힘과 친근함을 함께 기대합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백호 마스코트 수호랑에는 선수와 참가자, 관중을 보호한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베갯모의 자수가 손거울의 디자인으로 활용되고, 2025년 까치호랑이 문화상품이 관심을 모은 일은 옛 도상을 일상에서 지니려는 취향을 보여 줍니다. 오래된 상징은 오늘의 물건과 감상 속에서 새로운 접점을 얻습니다.
다음에 박물관이나 온라인 소장품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눈매를 본 뒤 앞발과 꼬리로 시선을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 몸이 놓인 바위와 종이, 그릇과 직물까지 함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드는 한 마리를 고르는 일은 자신이 어떤 표현에 끌리는지 발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오래된 호랑이는 다시 우리 곁의 존재가 됩니다
선사시대 바위그림에서 조선의 백자까지
2025년 여름,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는 박물관 문화상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까치와 호랑이를 담은 배지가 품절됐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화면 속 캐릭터에 대한 호감이 옛 그림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의 관람객에게 호랑이는 위엄있는 맹수이면서, 가까이 두고 싶은 친근한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호랑이는 어떤 눈매와 자세를 지닐 때 무섭거나 친근하게 보일까요. 눈과 동공의 형태, 몸통의 무늬, 움직임의 기세를 뜻하는 동세를 따라 문화유산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위에 새긴 윤곽선 에서 출발해 무덤의 백호와 고려의 거울을 지나, 조선의 회화·민화와 필통·베개에 이르기까지 호랑이의 얼굴이 달라지는 이유를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1. 윤곽선과 줄무늬로 드러나는 선사시대의 몸짓
첫 목적지는 울산 반구대암각화입니다. 2025년 7월 12일 ‘반구천의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습니다. 긴 몸 안에 줄무늬가 반복되는 동물이, 오른쪽 아래에는 점무늬가 있는 동물이 보입니다. 외곽선이 머리와 몸통, 다리의 형태를 잡는다면 내부문양은 동물을 구별하는 단서가 됩니다.
(사진 출처 : 공공누리)
호랑이 몸통의 가로 방향과 줄무늬가 새겨진 방향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긴 몸 안에 짧은 선들이 반복되면서 윤곽과 다른 리듬을 만듭니다. 이어 배 아래로 뻗은 다리의 간격과 꼬리의 방향을 따라가면, 동물을 식별하던 시선이 자세와 동세를 읽는 시선으로 옮겨 갑니다.
이처럼 선사시대의 호랑이는 얼굴의 세부 표정보다 몸의 윤곽과 문양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입체적인 털의 질감을 재현하지 않아도, 줄무늬와 네 다리의 배치만으로 동물의 특징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형상만으로 특정한 사냥 장면이나 제작자의 의도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호랑이의 신체 특징 중 무엇을 강조하고 생략했는지 살피는 편이 실제 표현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입니다.
2. 길게 뻗는 고구려 백호와 원을 따르는 고려의 호랑이
고구려 강서대묘의 백호에서는 몸의 비례가 크게 달라집니다. 아래 모사도를 보면 가늘고 긴목이 휘어 올라가고, 몸통에서 이어진 꼬리는 오른쪽 위로 길게 뻗습니다. 다리는 몸통에서 여러 방향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머리와 몸통을 잇는 곡선, 다리와 꼬리가 뻗는 방향을 함께 따라가면, 육중한 체구보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유연한 동세가 두드러집니다.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세부 장식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입 주변의 붉은색과 어깨 부근에서 휘감기는 장식적 선은 몸의 굴곡을 강조합니다. 반구대의 문양이 동물의 특징을 알아보는 단서였다면, 이 백호의 길어진 신체와 장식은 현실의 맹수에서 벗어난 신령한 인상을 만듭니다. 백호는 서쪽을 맡아 무덤을 수호하는 사신(四神)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려의 청동거울에서는 긴 몸이 원형 화면에 맞추어 굽어집니다. 지름 10.1cm인 거울의 문양 면에는 중앙의 꼭지를 사이에 두고 두 마리 호랑이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위쪽 호랑이의 머리는 오른쪽에, 아래쪽 호랑이의 머리는 왼쪽에 있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합니다. 둥근 테두리를 따르는 등과 길게 휜 꼬리를 번갈아 보면, 시선도 자연스럽게 원을 따라 움직입니다.
두 유물은 모두 신체를 길게 표현하지만,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벽화의 백호는 다리와 꼬리를 바깥으로 펼치며 운동감을 확장합니다. 거울의 두 호랑이는 한정된 원 안에서 몸을 굽히고 서로 대응하는 배치를 이룹니다. 또한 종이에 옮긴 벽화의 색과 선에 비해, 거울에서는 도드라진 양각 문양의 높낮이와 그늘이 형태를 드러냅니다. 같은 호랑이라도 표현 재료와 화면의 형태가 달라지면 몸을 읽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무덤을 지키는 백호에서 생활용품을 장식한 호랑이로 옮겨 온 시선을, 이제 조선의 회화와 백자로 이어 보겠습니다. 신체의 비례와 문양에 더해, 눈매와 필선의 차이가 표정을 한층 풍부하게 드러냅니다.
3. 눈매와 필선이 빚어내는 조선의 표정
조선의 호랑이 그림에서는 먼저 얼굴을, 다음에는 발과 꼬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세 작품은 사실적인 털 묘사와 과장된 비례가 여러 방식으로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민화 역시 회화의 한 갈래입니다. 두 범주를 갈라 놓기보다, 같은 호랑이 도상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변주되는 데 주목해 보겠습니다.
(사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사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용맹한 호랑이〉는 눈 위쪽 윤곽이 낮게 눌려 있고 동공은 세로로 길쭉합니다. 낮춘 머리와 엇갈린 앞발은 앞으로 다가오는 긴장감을 만듭니다. 세필, 곧 가는 붓으로 촘촘히 묘사한 털 위에 굵은 줄무늬가 몸의 굴곡을 따라 휘어집니다. 필선의 밀도와 무늬의 곡률이 체구의 양감, 즉 부피감을 드러냅니다. 가운데 〈호랑이〉는 둥근 눈과 작은 원형 동공, 높이 솟은 등이 먼저 눈길을 끕니다. 앞발은 나란히 모이고 꼬리는 발 앞을 낮게 가로지릅니다. 첫 그림의 전진하는 기세에 비해, 동그랗게 몸을 모은 채 멈칫한 듯한 인상이 강합니다. 이 그림에도 가는 털 묘사는 남아 있습니다. 익살은 묘사의 부족보다 비례와 자세의 차이에서 생겨납니다.
민화의 까치호랑이 도상을 보여 주는 〈호랑이와 까치〉에서는 송곳니를 드러낸 입과 크게 벌린 눈이 공존합니다. 굵은 줄무늬가 몸을 감싸고, 위로 길게 치솟은 꼬리는 소나무 가지 사이를 가릅니다. 작은 까치 두 마리와 화면을 차지한 큰 호랑이의 대비도 흥미롭습니다. 이빨만 보면 사납지만 얼굴 전체와 새의 크기를 함께 보면 어딘가 과장된 연극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중·후기 호도 연구는 전문 화가의 그림과 민화 사이에서 도상이 이어지고 변형된 양상을 다룹니다. 세 작품을 정교함이 사라지는 순서로 나열하기보다, 날카로운 눈·둥근 눈·과장된 눈이 각각 어떤 감정을 불러오는지 비교하는 편이 풍성한 감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4. 백자 필통과 베개, 생활 속으로 들어온 호랑이
그림에서 눈을 맞춘 호랑이가 이번에는 책상과 잠자리 가까이 다가옵니다. 붓으로 그린 형상은 백자 표면의 채색과 양각으로, 다시 직물의 자수로 옮겨 갑니다. 재료가 달라질 때 눈과 입, 줄무늬를 표현하는 방식도 조금 다릅니다.
(사진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18세기 〈백자 까치 호랑이 무늬 항아리〉는 오른쪽 높은 가지의 까치와 왼쪽 아래 호랑이가 사선으로 마주 놓입니다. 입구 아래와 몸통 하단의 문양 띠는 가운데 장면을 감쌉니다. 푸른 청화의 농담, 곧 짙고 옅음과 흰 여백이 형태를 구분하는 가운데, 몸에는 속이 빈 환형 반점과 줄무늬가 함께 나타납니다. 조선 백자에서 호랑이와 표범의 표현이 혼용된 예입니다. 필통에서는 얼굴이 표면 앞으로 도드라집니다. 양각으로 솟은 둥근 눈과 코, 길게 휘어진 입선이 빛과 그늘을 받아 표정을 만듭니다. 푸른 청화와 갈색 계열 철화가 줄무늬와 반점을 나누어 장식하고, 굽힌 다리는 원통의 아래쪽을 따라 놓입니다.
항아리의 호랑이가 흰 바탕 위에 그려진 장면이라면, 필통의 호랑이는 둥근 기벽에 몸을 붙이고 우리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베개에서는 감상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집니다. 베갯모는 베개 양 끝에 붙이는 장식입니다. 사진의 두 원형 장식은 짙은 테두리 안에 호랑이 문양을 담았습니다. 넓은 회화 화면과 달리, 작은 원 안에 형상을 모으고 경계를 두른 구성이 두드러집니다. 먹의 농담이나 도자의 요철을 보던 시선이 이제 실로 채운 색면과 문양의 배치로 옮겨 갑니다.
호랑이를 잠자리 곁에 둔 마음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무서운 짐승의 힘에 기대면서도 그 모습을 매일 가까이 두었던 것입니다. 귀여운 표정과 든든한 보호자의 역할은 이렇게 한 물건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5. 우리 곁에 머무는 호랑이의 여러 얼굴
조선 후기 백자 연구에서는 18세기의 세밀한 털 묘사와 함께, 19세기 일부 예에서 길어진 몸통과 커진 머리, 간략해진 표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태의 생략과 비례의 과장은 새로운 표정을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회화·민화·필통·베갯모를 함께 보면, 이러한 조형의 변화가 재료와 쓰임에 따라 얼마나 다채롭게 펼쳐졌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는 맹수이면서 보호하는 존재, 은혜를 갚는 동물이면서 어리석은 동물이 기도 했습니다.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와 해학적인 표정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사시대의 무서운 호랑이가 조선의 귀여운 호랑이로 변했다고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시대에도 용맹함과 익살, 두려움과 친근함이 겹쳐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호랑이에게 힘과 친근함을 함께 기대합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백호 마스코트 수호랑에는 선수와 참가자, 관중을 보호한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베갯모의 자수가 손거울의 디자인으로 활용되고, 2025년 까치호랑이 문화상품이 관심을 모은 일은 옛 도상을 일상에서 지니려는 취향을 보여 줍니다. 오래된 상징은 오늘의 물건과 감상 속에서 새로운 접점을 얻습니다.
다음에 박물관이나 온라인 소장품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눈매를 본 뒤 앞발과 꼬리로 시선을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 몸이 놓인 바위와 종이, 그릇과 직물까지 함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드는 한 마리를 고르는 일은 자신이 어떤 표현에 끌리는지 발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오래된 호랑이는 다시 우리 곁의 존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