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신라시대 대형 고분에서 금으로 제작된 화려한 금속품들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금관은 지금까지 총 6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신라 금관은 황남대총 북분(1975년), 금관총(1921년), 서봉총(1926년), 금령총(1924년), 천마총(1973년)으로 양식이 변화하게 됩니다. 신라 금관은 출토지가 분명한 이 5점과, 교동 출토품으로 전하지만 도굴 되었다가 되찾은 출토지가 불분명한 1점까지 총 6점의 금관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금관은 김씨 세습이 이어지면서 왕권이 강화된 마립간 시기에 나타난 유물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는 내용과 맞닿아 있는 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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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 높이 27.3cm, 경주 황남대총 출토 (사진 출처 : 이뮤지엄) | <신라 금관>, 높이 27.7cm, 경주 금관총 출토 (사진 출처 : 이뮤지엄) | <신라 금관>, 높이 35cm, 경주 서봉총 출토 (사진 출처 : 이뮤지엄) | <신라 금관>, 높이 49.2cm, 경주 금령총 출토 (사진 출처 : 이뮤지엄) | <신라 금관>, 높이 32.5cm, 경주 천마총 출토 (사진 출처 : 이뮤지엄) |
5세기 3/4분기 후반 | 5세기 4/4분기 후반 | 5세기 4/4분기 후반 | 6세기 1/4분기 | 6세기 1/4분기 |
금관은 주로 조형적인 요소의 분석과 기원 그리고 용도 등에 관한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신라의 정치적인 변화와 함께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3개의 '出'자형 맞가지 세움장식과 2개의 엇가지 세움장식 모습을 갖춘 신라 금관의 정형이 완성되는 몇 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쳤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신라금관은 마립간 시기에 조형된 경주지역의 대형적석목곽분에서만 출토되었기 때문에 고위층 혹은 왕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금관에서 보이는 북방 요소들과 샤먼의 관과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 신라의 지도자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금관에 대해 둘러싼 간단한 이야기와 발굴된 순서로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신라의 대형 고분들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한반도 남부 역사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게 됩니다. 가장 관심을 가진 곳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와 경주는 신공왕후가 바다를 건너 정복한 곳이라는 내용이 전하며, 조선시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초기부터 점령했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점령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여 조선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구조였습니다.
일제의 관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주 지역의 신라 고분은 구조가 복잡했기 때문에 1920년까지 발굴 성과라고 할만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1921년 금관총의 우연한 발굴로 인해 신라 고분 발굴이 급격히 진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 금관총
금관총 금관은 1921년 박문환의 집을 공사하던 중 경주경찰서 도순사 미야케에 의해 우연히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미야케가 공사를 중지시키고 유물을 수습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금관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일제강점기 신라 고분은 우선 발굴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적석목곽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으며, 발견 당시부터 상당부분이 파괴되어 있어 금관총은 정식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다만 금관총의 발견으로 신라 고분에 대한 조사가 급격히 진행되기 시작하였으며, 적석목곽분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기 시작합니다.
2. 금령총
금령총은 1924년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서양인으로 신라 금관을 주목한 사람은 벨기에 켄트 대학의 핸체 교수입니다. 금관의 형태가 샤먼 관의 순록뿔과 비교하면서 왕족의 머리 관식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신라 금관을 샤먼 권위의 상징물로 여겼고 한국학계에서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추정은 마립간 시대의 묘제인 적석목곽분의 연원을 북방 스텝지역의 쿠르간 묘에서 찾는 논의와 맞물려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금관의 모습을 살펴보면 금령총 금관은 관테의 가운데 부분에 3개의 맞가지 세움장식을 달고 양 옆에 2개의 엇가지 세움장식을 부착하였습니다. 5개의 세움장식은 각각 2개씩의 금못을 이용하여 부착하였습니다. 다른 금관과 비교하면 크기가 다소 작고, 곡옥이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세움장식 테두리에 있는 연속점 무늬는 장식을 위한 문양 효과도 있지만 얇은 금판으로 만든 세움장식이 꺾이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3. 서봉총
다음은 서봉총입니다. 1926년 10월 10일, 스웨덴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가 황태자비 루이즈 마운트배튼과 함께 경주 노서리 봉황대 인근의 한 고분 발굴 현장을 찾았습니다. 스웨덴 황태자 내외의 경주 방문은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을 둘러보고 일본으로 들어가 한동안 머문 뒤 조선을 거쳐, 중국·인도로 향하는 여정에 맞춰 계획된 일정이었습니다. 이때 식민지 조선의 통치를 총괄했던 조선총독부의 외사과(外事課)가 의전을 담당했으며 조사 범위의 부분마다 노출된 유물들의 층위와 배치를 도면으로 작성하고 사진을 촬영한 뒤 수습하는 절차를 무시하고 목관 내부의 장신구들을 착장 상태대로 배치하여 발굴한 후에 구스타프 황태자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황태자는 고고학·미술사학을 관심사로 삼았으며 중국 예술품을 두드러지게 수집하는 데다, 그리스·로마 고분 발굴 경험도 풍부했습니다. 그가 목관 가까이 들어오자 도구로 무덤 주인공의 허리띠드리개·장신구·금관·청동 초두 등을 수습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날의 일화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 ‘스웨덴과 일본 사이 교정(交情)의 표징(表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때 크게 감격한 일본인 조사 담당자들은 황태자에게 이름 없는 무덤의 이름을 붙여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황태자는 자신을 수행하던 교토대학 교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논의하여, 스웨덴의 한자 표기자인 ‘서전(瑞典)’에서 ‘서(瑞)’자를 따고 금관의 새 모양 장식을 봉황으로 보아 여기서 ‘봉(鳳)’자를 따서 둘을 합쳐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서봉총의 금관은 다른 금관들에는 없는 독특한 특을 갖고 있습니다. 관 안쪽에 좁고 긴 금판 2매[梁帶]가 ‘十’자 형태로 엇갈려 고정되어 있으며, 그곳에 세 줄기로 갈라져 뻗은 장식을 부착하고, 각 장식끝에 봉황을 닮은 새 장식을 하나씩 단 점은 서봉총 금관만의 특성입니다.
4. 천마총
천마총 발굴은 197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천마도>와 함께 1만 50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본래 일제강점기 보고되었던 황남대총을 발굴하고 그 내부를 공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1971년 대형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 없어 정부, 문화재계, 학계 모두 조심스러운 입장이었습니다. 더구나 무령왕릉의 졸속발굴이 이루어진지 얼마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민감하였습니다. 이에 황남대총보다 규모가 작은 155호분을 발굴하게 되었는데 금관을 비롯하여 중요한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양식적으로 가장 후에 만들어졌으며, 복잡하고 화려한 금관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2개의 무덤이 연결되어 있는 쌍분으로 크기가 가장 큰 대형 고분 중 하나입니다. 황남대총은 규모가 경주의 다른 고분과 비교해 월등히 크고 유물의 품질이 매우 좋기 때문에 왕릉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황남대총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발견되어 98호 무덤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황남대총은 1973년에 비로소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1976년 황남대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황남대총의 남분은 남성의 것이고 북분은 여성의 것으로 밝혀져 피장자의 관계가 부부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금관이 북분에서도 발견된 점입니다. 신라 금관은 당연히 남성 지배층이 썼을 것이라 추정하였으나 황남대총의 발굴로 금관의 용도와 사용계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신라시대 대형 고분에서 금으로 제작된 화려한 금속품들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금관은 지금까지 총 6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신라 금관은 황남대총 북분(1975년), 금관총(1921년), 서봉총(1926년), 금령총(1924년), 천마총(1973년)으로 양식이 변화하게 됩니다. 신라 금관은 출토지가 분명한 이 5점과, 교동 출토품으로 전하지만 도굴 되었다가 되찾은 출토지가 불분명한 1점까지 총 6점의 금관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금관은 김씨 세습이 이어지면서 왕권이 강화된 마립간 시기에 나타난 유물로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는 내용과 맞닿아 있는 유물입니다.
(사진 출처 : 이뮤지엄)
(사진 출처 : 이뮤지엄)
(사진 출처 : 이뮤지엄)
(사진 출처 : 이뮤지엄)
(사진 출처 : 이뮤지엄)
금관은 주로 조형적인 요소의 분석과 기원 그리고 용도 등에 관한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신라의 정치적인 변화와 함께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3개의 '出'자형 맞가지 세움장식과 2개의 엇가지 세움장식 모습을 갖춘 신라 금관의 정형이 완성되는 몇 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쳤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신라금관은 마립간 시기에 조형된 경주지역의 대형적석목곽분에서만 출토되었기 때문에 고위층 혹은 왕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금관에서 보이는 북방 요소들과 샤먼의 관과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 신라의 지도자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금관에 대해 둘러싼 간단한 이야기와 발굴된 순서로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신라의 대형 고분들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한반도 남부 역사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게 됩니다. 가장 관심을 가진 곳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와 경주는 신공왕후가 바다를 건너 정복한 곳이라는 내용이 전하며, 조선시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초기부터 점령했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점령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여 조선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구조였습니다.
일제의 관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주 지역의 신라 고분은 구조가 복잡했기 때문에 1920년까지 발굴 성과라고 할만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1921년 금관총의 우연한 발굴로 인해 신라 고분 발굴이 급격히 진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 금관총
금관총 금관은 1921년 박문환의 집을 공사하던 중 경주경찰서 도순사 미야케에 의해 우연히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미야케가 공사를 중지시키고 유물을 수습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금관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일제강점기 신라 고분은 우선 발굴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적석목곽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으며, 발견 당시부터 상당부분이 파괴되어 있어 금관총은 정식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다만 금관총의 발견으로 신라 고분에 대한 조사가 급격히 진행되기 시작하였으며, 적석목곽분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기 시작합니다.
2. 금령총
금령총은 1924년 발굴되었습니다. 당시 서양인으로 신라 금관을 주목한 사람은 벨기에 켄트 대학의 핸체 교수입니다. 금관의 형태가 샤먼 관의 순록뿔과 비교하면서 왕족의 머리 관식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신라 금관을 샤먼 권위의 상징물로 여겼고 한국학계에서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추정은 마립간 시대의 묘제인 적석목곽분의 연원을 북방 스텝지역의 쿠르간 묘에서 찾는 논의와 맞물려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금관의 모습을 살펴보면 금령총 금관은 관테의 가운데 부분에 3개의 맞가지 세움장식을 달고 양 옆에 2개의 엇가지 세움장식을 부착하였습니다. 5개의 세움장식은 각각 2개씩의 금못을 이용하여 부착하였습니다. 다른 금관과 비교하면 크기가 다소 작고, 곡옥이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세움장식 테두리에 있는 연속점 무늬는 장식을 위한 문양 효과도 있지만 얇은 금판으로 만든 세움장식이 꺾이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경주 금령총 발굴 전 전경, 11.9x16.4cm,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사진 출처 : 이뮤지엄)
3. 서봉총
다음은 서봉총입니다. 1926년 10월 10일, 스웨덴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가 황태자비 루이즈 마운트배튼과 함께 경주 노서리 봉황대 인근의 한 고분 발굴 현장을 찾았습니다. 스웨덴 황태자 내외의 경주 방문은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을 둘러보고 일본으로 들어가 한동안 머문 뒤 조선을 거쳐, 중국·인도로 향하는 여정에 맞춰 계획된 일정이었습니다. 이때 식민지 조선의 통치를 총괄했던 조선총독부의 외사과(外事課)가 의전을 담당했으며 조사 범위의 부분마다 노출된 유물들의 층위와 배치를 도면으로 작성하고 사진을 촬영한 뒤 수습하는 절차를 무시하고 목관 내부의 장신구들을 착장 상태대로 배치하여 발굴한 후에 구스타프 황태자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황태자는 고고학·미술사학을 관심사로 삼았으며 중국 예술품을 두드러지게 수집하는 데다, 그리스·로마 고분 발굴 경험도 풍부했습니다. 그가 목관 가까이 들어오자 도구로 무덤 주인공의 허리띠드리개·장신구·금관·청동 초두 등을 수습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날의 일화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 ‘스웨덴과 일본 사이 교정(交情)의 표징(表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때 크게 감격한 일본인 조사 담당자들은 황태자에게 이름 없는 무덤의 이름을 붙여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황태자는 자신을 수행하던 교토대학 교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논의하여, 스웨덴의 한자 표기자인 ‘서전(瑞典)’에서 ‘서(瑞)’자를 따고 금관의 새 모양 장식을 봉황으로 보아 여기서 ‘봉(鳳)’자를 따서 둘을 합쳐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서봉총의 금관은 다른 금관들에는 없는 독특한 특을 갖고 있습니다. 관 안쪽에 좁고 긴 금판 2매[梁帶]가 ‘十’자 형태로 엇갈려 고정되어 있으며, 그곳에 세 줄기로 갈라져 뻗은 장식을 부착하고, 각 장식끝에 봉황을 닮은 새 장식을 하나씩 단 점은 서봉총 금관만의 특성입니다.
경북경주 서봉총 스웨덴 황태자 일행 방문, 25.2x30.3cm,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사진 출처 : 이뮤지엄)
서봉총 금관과 경흉식 노출 상태, 11.9x16.4cm,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사진 출처 : 이뮤지엄)
4. 천마총
천마총 발굴은 197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천마도>와 함께 1만 500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본래 일제강점기 보고되었던 황남대총을 발굴하고 그 내부를 공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1971년 대형 고분을 발굴한 경험이 없어 정부, 문화재계, 학계 모두 조심스러운 입장이었습니다. 더구나 무령왕릉의 졸속발굴이 이루어진지 얼마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민감하였습니다. 이에 황남대총보다 규모가 작은 155호분을 발굴하게 되었는데 금관을 비롯하여 중요한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양식적으로 가장 후에 만들어졌으며, 복잡하고 화려한 금관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황남대총 북분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2개의 무덤이 연결되어 있는 쌍분으로 크기가 가장 큰 대형 고분 중 하나입니다. 황남대총은 규모가 경주의 다른 고분과 비교해 월등히 크고 유물의 품질이 매우 좋기 때문에 왕릉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황남대총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발견되어 98호 무덤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황남대총은 1973년에 비로소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1976년 황남대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황남대총의 남분은 남성의 것이고 북분은 여성의 것으로 밝혀져 피장자의 관계가 부부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금관이 북분에서도 발견된 점입니다. 신라 금관은 당연히 남성 지배층이 썼을 것이라 추정하였으나 황남대총의 발굴로 금관의 용도와 사용계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