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문화유산 추천에서 소개해 드릴 우리의 문화유산은 바로 '고사관수도'입니다.

전(傳) 강희안(姜希顏),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조선 16세기 중반, 종이에 먹, 37.6 × 31.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 조선 전기 미술 대전 개최
올해 2025년, 용산 개관 20주년을 맞이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 전기의 미술을 주제로 한 특별전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을 개최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1392년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조명하며, 이전 시대의 미술적 전통을 바탕으로, 유교라는 새로운 이념 속 이상을 담아낸 조선만의 독자적인 미술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시회 ‘제2부 - 묵 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에서는 유교적 관명을 시詩 · 서書 · 화 畵의 예술로 표현하고 이를 향유했던 조선 전기 사대부들의 서화 작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조선 초에 이르러 서화는 사대부 계층의 미술로 그 기반이 확고해지면서 본격적으로 ‘문인화’ 작품의 등장을 이끌었습니다. 사대부들은 서로 간의 이념과 감흥의 교환하고 심성을 닦는 매체로서 시와 그림을 즐겼으며, 서화는 이들의 취향과 긴밀히 맞닿으면서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교양 덕목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번 추천글에서는 조선 전기의 사대부 출신 문인 화가이자 세종대의 대표적인 관료인 ‘강희안’에 주목하며 그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그의 전칭작(傳稱作)으로 전해져 오는 많은 작품 중에서도, 유일하게 강희안의 진작으로 믿어지는 회화인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살펴보겠습니다.
2. 강희안과 〈고사관수도〉
(1) 사대부 문인화가, 강희안(姜希顏, 1419~1464)
강희안은 화원이었던 안견(安堅, 1440~1470?)과 함께 15세기의 회화를 대표하는 사대부 화가였습니다. 진주(晉州) 본관의 강희안은 자(字)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로, 뛰어난 문장가로 칭송받는 동생 강희맹(姜希孟, 1424~1483)과 함께 시·서·화의 삼절로 저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서화에 있어 산수, 인물, 대나무, 난초, 초충 등 다양한 분야의 그림에 정통하여 강희안은 당대 사대부 출신 문인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강희안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사관수도〉는 종이 바탕에 채색 없이 먹으로만 그려진 그림으로, 바위에서 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인물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2) 〈고사관수도〉의 양식적 특징
〈고사관수도〉는 인물 중심의 산수화라는 점에서, 자연 위주로 표현하던 안견파의 산수화와는 큰 대조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인물이 주가 되고 그 주변의 간소하게 묘사된 자연물을 배경으로 하는 그림을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라 일컫습니다.
인물의 생동하는 표정과 활달한 필치의 거침없는 절벽과 넝쿨 표현, 관조적이면서도 사색적인 분위기와 문기가 넘치는 화면 구성이 두드러지는 〈고사관수도〉는 사대부 화가 특유의 문인적인 격조와 취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크게 부각된 인물 묘사, 붓으로 쓸 듯이 문질러 표현된 거꾸로 매달린 바위, 바위 옆으로 드리워진 넝쿨, 분방한 필묵법과 흑백 대비 효과 등이 인물 산수화로서 〈고사관수도〉의 주요 양식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① 인물 표현
〈고사관수도〉 속의 인물은 암벽 아래에 놓인 큰 바위에 두 팔로 턱을 고인 채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 작품명에도 들어가는 ‘고사(高士)’는 인격이 높고 성품이 깨끗한 선비를 지칭하는 말로, 특히 자연에서 은거하며 세속에 물들지 않은 덕망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림에 묘사된 고사의 초탈한 자태는 마치 혼탁한 속세를 피해 자연 속에서 머물며 마음을 닦고 심성을 수양하고자 했던 당시 선비들의 풍모를 대변하는 듯합니다. |
작은 크기의 화면 안에 대자연 속에서 사색하고 있는 고사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고사관수도〉는 ‘고사관수(물을 바라보는 선비)’의 회화 주제를 사대부 화가의 솜씨를 잘 담아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② 초묵(焦墨) 표현
초묵은 농도에 따라 먹의 되기를 구분한 표현으로서, 아주 짙은 먹의 색을 가리킵니다. 초묵은 〈고사관수도〉에서 초묵은 그림 상단 및 하단에 보이는 바위 표면에 적극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③ 넝쿨과 바위 및 갈대 표현
〈고사관수도〉에 큰 면적으로 묘사된 거대한 바위와 밑으로 뻗어 내린 넝쿨 표현은 작품 전체의 중심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삼각형 모양의 작은 바위들과 갈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활달한 필치로 표현된 갈대들은 수면(水面)의 느낌을 강조하고 동시에 시정적인 운치를 더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 
|
3. ‘인재’ 도장
그림 속 ‘인재(仁齋)’로 읽히는 도장은 그림 전체적으로 보이는 문인적인 품격과 더불어, 〈고사관수도〉가 조선 전기의 사대부 화가 강희안의 작품으로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사관수도〉의 왼편 중앙 위쪽에는 글자 부분이 하얗게 나오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의 ‘인재’ 도장이 나타납니다.

| 〈고사관수도〉의 왼편 중앙 위쪽에는 글자 부분이 하얗게 나오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의 ‘인재’ 도장이 나타납니다. 강희안의 호와 상응하는 ‘인재’ 도장은 현재 해당 작품의 작자를 강희안으로 비정하는 데 있어 신뢰할 만한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작자의 관지(款識)와 인장이 남아있는 조선 초·중기 회화작품들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고사관수도〉에 보이는 인재 도장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해당 작품과 비슷한 시기의 작품들을 보면, 조선 초 작품인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지곡가도작’이라는 관지와 함께 ‘가도’ 도장이 찍혀있고, 중기 작품 김시(金禔, 1524~1593)의 〈동자견려도〉에는 ‘김시’라는 관지와 함께 ‘김시계수’ 도장이 찍혀있습니다. 이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강희안의 관지 없이 도장만 찍힌 〈고사관수도〉는 당대 일반적으로 이루어진 날인 방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물론 현재 남아있는 조선 전기 작품들의 경우 대부분 관지 및 도장이 없는 ‘전칭작’에 해당하기에 이 시기의 관지 및 날인 관행을 알 수 있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몽유도원도〉와 〈동자견려도〉에 나타난 방식이 중국 회화작품들의 방식과 상응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방식이 일반적인 경우였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4. 고사관수도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
최근 연구가 진척되면서, 그간 강희안의 작품이라고 믿어지는 〈고사관수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① 도장의 후날 가능성 - 작자 비정에 대한 재검토 | ② 기존 작품명을 대체하는 새로운 명명법 제시 |
[주장] 강희안의 작품으로 확실시한 근거로 작용하는 ‘인재’ 도장이 작품 완성 이후에 찍혔을[後捺] 가능성을 현재 쉽게 긍정 또는 부정하기 어려움. 도장이 찍힌 부분의 종이와 그림의 본지가 종이의 품질에 있어 차이가 나며, 도장 크기 또한 그림의 크기와 비교했을 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큼. 또한 조선 전기 ‘인재’라는 호를 사용한 인물이 강희안이 유일하지 않음. 따라서 도장 자체만으로는 작품의 작자를 강희안으로 단정하기엔 어려움.
| [주장] 작품 속 고사의 시점이 물을 향한다는 판단으로 규정한 기존의 고사‘관수’도 보다는, 물 밖으로 나온 ‘수석’과 일직선상에 있는 고사의 시선, 고사의 작품 외적 주체인 강희안이 지녔던 애석관(愛石觀)을 고려하여 고사‘관석’도로 명명하는 것이 적절.
|
[뒷받침 내용] 작품에 대한 '양식 분석'을 바탕으로 작자 문제를 규명하고자 함. 〈고사관수도〉에 묘사된 도상 요소들의 모티프와 동시대 중국 화가 및 화풍과의 긴밀한 상관성을 고찰하고 작자 비정과 더불어 작품 연대를 제시. 대표적으로 〈고사관수도〉 하단 굵은 윤곽선을 두르고 그 내부를 여백으로 처리한 삼각형 모양의 작은 바위와 갈대 조합 모티프는 중국 절파계 화가 장숭(蒋嵩, ?~?)의 화풍에 그 양식적 연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음. 
장숭, 〈어주독서도(魚舟讀書圖)〉 하단부, 16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170.1 × 107.5cm,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출처: 單國强 編, 『院體浙派繪畵』, 商務印書館, 2007>
| [근거자료] 강희안 저술,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 화훼와 수석을 좋아하여 남긴 그의 저서 『양화소록』에서 찾을 수 있는 강희안의 애석관(愛石觀)과 관련된 여러 정황과 기록. 수석을 향유하는 방식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점, 〈고사관수도〉 속 주인공인 고사의 눈동자 시선이 물위로 드러나 있는 괴석과 일직선상에 있다는 점.
|
출처: 장진성, 「강희안 필 〈고사관수도〉의 작자 및 연대 문제」, 2009. | 출처: 신석주, 「姜希顔 作 <高士觀水圖>의 작품 名稱에 관한 고찰」, 2017. |
이처럼 한 작품을 두고도 학계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개진되고 있습니다. 강희안을 둘러싼 활발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고사관수도〉를 둘러싼 새로운 해석과 논의가 어떻게 등장하고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입니다.
참고문헌
- 김원용, 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 :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시공사, 2003.
- 설서현, 「傳 姜希顔 筆 <折梅揷甁圖>, <小僮開門圖>, <高士渡橋圖> 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9.
- 신석주, 「姜希顔 作 <高士觀水圖>의 작품 名稱에 관한 고찰」, 『문화와예술연구』 Vol.9,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2017.
- 안휘준, 「韓國 山水畵의 發達 硏究」, 『미술자료』 No.26, 국립중앙박물관, 1980.
- 장진성, 「강희안 필 〈고사관수도〉의 작자 및 연대 문제」,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8,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09.
- 홍선표, 「仁齋 姜希顏의 ‘高士觀水圖’ 硏究」, 『한국학』 Vol.8 No.4, 한국학중앙연구원, 1985.
- 국가유산청.
- 국립중앙박물관.
사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사진들은 모두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이번 문화유산 추천에서 소개해 드릴 우리의 문화유산은 바로 '고사관수도'입니다.
전(傳) 강희안(姜希顏),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조선 16세기 중반, 종이에 먹, 37.6 × 31.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 조선 전기 미술 대전 개최
올해 2025년, 용산 개관 20주년을 맞이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 전기의 미술을 주제로 한 특별전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을 개최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1392년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조명하며, 이전 시대의 미술적 전통을 바탕으로, 유교라는 새로운 이념 속 이상을 담아낸 조선만의 독자적인 미술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시회 ‘제2부 - 묵 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에서는 유교적 관명을 시詩 · 서書 · 화 畵의 예술로 표현하고 이를 향유했던 조선 전기 사대부들의 서화 작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조선 초에 이르러 서화는 사대부 계층의 미술로 그 기반이 확고해지면서 본격적으로 ‘문인화’ 작품의 등장을 이끌었습니다. 사대부들은 서로 간의 이념과 감흥의 교환하고 심성을 닦는 매체로서 시와 그림을 즐겼으며, 서화는 이들의 취향과 긴밀히 맞닿으면서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교양 덕목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번 추천글에서는 조선 전기의 사대부 출신 문인 화가이자 세종대의 대표적인 관료인 ‘강희안’에 주목하며 그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그의 전칭작(傳稱作)으로 전해져 오는 많은 작품 중에서도, 유일하게 강희안의 진작으로 믿어지는 회화인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살펴보겠습니다.
2. 강희안과 〈고사관수도〉
(1) 사대부 문인화가, 강희안(姜希顏, 1419~1464)
강희안은 화원이었던 안견(安堅, 1440~1470?)과 함께 15세기의 회화를 대표하는 사대부 화가였습니다. 진주(晉州) 본관의 강희안은 자(字)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로, 뛰어난 문장가로 칭송받는 동생 강희맹(姜希孟, 1424~1483)과 함께 시·서·화의 삼절로 저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서화에 있어 산수, 인물, 대나무, 난초, 초충 등 다양한 분야의 그림에 정통하여 강희안은 당대 사대부 출신 문인화가로서 명성이 자자하였습니다. 강희안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사관수도〉는 종이 바탕에 채색 없이 먹으로만 그려진 그림으로, 바위에서 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인물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2) 〈고사관수도〉의 양식적 특징
〈고사관수도〉는 인물 중심의 산수화라는 점에서, 자연 위주로 표현하던 안견파의 산수화와는 큰 대조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인물이 주가 되고 그 주변의 간소하게 묘사된 자연물을 배경으로 하는 그림을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라 일컫습니다.
인물의 생동하는 표정과 활달한 필치의 거침없는 절벽과 넝쿨 표현, 관조적이면서도 사색적인 분위기와 문기가 넘치는 화면 구성이 두드러지는 〈고사관수도〉는 사대부 화가 특유의 문인적인 격조와 취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크게 부각된 인물 묘사, 붓으로 쓸 듯이 문질러 표현된 거꾸로 매달린 바위, 바위 옆으로 드리워진 넝쿨, 분방한 필묵법과 흑백 대비 효과 등이 인물 산수화로서 〈고사관수도〉의 주요 양식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① 인물 표현
〈고사관수도〉 속의 인물은 암벽 아래에 놓인 큰 바위에 두 팔로 턱을 고인 채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작은 크기의 화면 안에 대자연 속에서 사색하고 있는 고사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고사관수도〉는 ‘고사관수(물을 바라보는 선비)’의 회화 주제를 사대부 화가의 솜씨를 잘 담아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② 초묵(焦墨) 표현
초묵은 농도에 따라 먹의 되기를 구분한 표현으로서, 아주 짙은 먹의 색을 가리킵니다. 초묵은 〈고사관수도〉에서 초묵은 그림 상단 및 하단에 보이는 바위 표면에 적극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사관수도〉에 큰 면적으로 묘사된 거대한 바위와 밑으로 뻗어 내린 넝쿨 표현은 작품 전체의 중심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삼각형 모양의 작은 바위들과 갈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활달한 필치로 표현된 갈대들은 수면(水面)의 느낌을 강조하고 동시에 시정적인 운치를 더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3. ‘인재’ 도장
그림 속 ‘인재(仁齋)’로 읽히는 도장은 그림 전체적으로 보이는 문인적인 품격과 더불어, 〈고사관수도〉가 조선 전기의 사대부 화가 강희안의 작품으로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사관수도〉의 왼편 중앙 위쪽에는 글자 부분이 하얗게 나오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의 ‘인재’ 도장이 나타납니다.
〈고사관수도〉의 왼편 중앙 위쪽에는 글자 부분이 하얗게 나오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의 ‘인재’ 도장이 나타납니다. 강희안의 호와 상응하는 ‘인재’ 도장은 현재 해당 작품의 작자를 강희안으로 비정하는 데 있어 신뢰할 만한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작자의 관지(款識)와 인장이 남아있는 조선 초·중기 회화작품들을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고사관수도〉에 보이는 인재 도장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해당 작품과 비슷한 시기의 작품들을 보면, 조선 초 작품인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지곡가도작’이라는 관지와 함께 ‘가도’ 도장이 찍혀있고, 중기 작품 김시(金禔, 1524~1593)의 〈동자견려도〉에는 ‘김시’라는 관지와 함께 ‘김시계수’ 도장이 찍혀있습니다. 이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강희안의 관지 없이 도장만 찍힌 〈고사관수도〉는 당대 일반적으로 이루어진 날인 방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현재 남아있는 조선 전기 작품들의 경우 대부분 관지 및 도장이 없는 ‘전칭작’에 해당하기에 이 시기의 관지 및 날인 관행을 알 수 있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몽유도원도〉와 〈동자견려도〉에 나타난 방식이 중국 회화작품들의 방식과 상응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방식이 일반적인 경우였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4. 고사관수도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
최근 연구가 진척되면서, 그간 강희안의 작품이라고 믿어지는 〈고사관수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주장]
강희안의 작품으로 확실시한 근거로 작용하는 ‘인재’ 도장이 작품 완성 이후에 찍혔을[後捺] 가능성을 현재 쉽게 긍정 또는 부정하기 어려움. 도장이 찍힌 부분의 종이와 그림의 본지가 종이의 품질에 있어 차이가 나며, 도장 크기 또한 그림의 크기와 비교했을 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큼. 또한 조선 전기 ‘인재’라는 호를 사용한 인물이 강희안이 유일하지 않음. 따라서 도장 자체만으로는 작품의 작자를 강희안으로 단정하기엔 어려움.
[주장]
작품 속 고사의 시점이 물을 향한다는 판단으로 규정한 기존의 고사‘관수’도 보다는, 물 밖으로 나온 ‘수석’과 일직선상에 있는 고사의 시선, 고사의 작품 외적 주체인 강희안이 지녔던 애석관(愛石觀)을 고려하여 고사‘관석’도로 명명하는 것이 적절.
[뒷받침 내용]
작품에 대한 '양식 분석'을 바탕으로 작자 문제를 규명하고자 함.
〈고사관수도〉에 묘사된 도상 요소들의 모티프와 동시대 중국 화가 및 화풍과의 긴밀한 상관성을 고찰하고 작자 비정과 더불어 작품 연대를 제시.
대표적으로 〈고사관수도〉 하단 굵은 윤곽선을 두르고 그 내부를 여백으로 처리한 삼각형 모양의 작은 바위와 갈대 조합 모티프는 중국 절파계 화가 장숭(蒋嵩, ?~?)의 화풍에 그 양식적 연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음.
장숭, 〈어주독서도(魚舟讀書圖)〉 하단부, 16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170.1 × 107.5cm,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출처: 單國强 編, 『院體浙派繪畵』, 商務印書館, 2007>
[근거자료]
강희안 저술,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
화훼와 수석을 좋아하여 남긴 그의 저서 『양화소록』에서 찾을 수 있는 강희안의 애석관(愛石觀)과 관련된 여러 정황과 기록.
수석을 향유하는 방식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점, 〈고사관수도〉 속 주인공인 고사의 눈동자 시선이 물위로 드러나 있는 괴석과 일직선상에 있다는 점.
이처럼 한 작품을 두고도 학계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개진되고 있습니다. 강희안을 둘러싼 활발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고사관수도〉를 둘러싼 새로운 해석과 논의가 어떻게 등장하고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입니다.
참고문헌
- 김원용, 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 :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시공사, 2003.
- 설서현, 「傳 姜希顔 筆 <折梅揷甁圖>, <小僮開門圖>, <高士渡橋圖> 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9.
- 신석주, 「姜希顔 作 <高士觀水圖>의 작품 名稱에 관한 고찰」, 『문화와예술연구』 Vol.9,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2017.
- 안휘준, 「韓國 山水畵의 發達 硏究」, 『미술자료』 No.26, 국립중앙박물관, 1980.
- 장진성, 「강희안 필 〈고사관수도〉의 작자 및 연대 문제」,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8,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09.
- 홍선표, 「仁齋 姜希顏의 ‘高士觀水圖’ 硏究」, 『한국학』 Vol.8 No.4, 한국학중앙연구원, 1985.
- 국가유산청.
- 국립중앙박물관.
사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사진들은 모두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에서 촬영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