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문화유산 추천에서 소개해드릴 우리의 문화유산은 바로 ‘외규장각 의궤’입니다.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肅宗仁顯王后嘉禮都監儀軌)에 수록된 반차도,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1.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실' 공개
여러분 작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외규장각 의궤실’이 새롭게 개관된 것을 알고 계셨나요?

외규장각 의궤실은 기존 서화 1실을 개편해 마련된 새로운 전시실로,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였다가 2011년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해당 전시실은 단순한 유물 전시를 넘어 조선 왕실의 기록문화로서 의궤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는데요, 그렇다면 왜 많은 의궤 중에서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의궤만이 선택되어 전시되고 있는 걸까요? 지금부터 외규장각 의궤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보며, 기록물로서 외규장각 의궤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겠습니다.
2. 의궤란 무엇인가?
(1) 조선의 기록 정신, 의궤
의궤는 ‘본보기 의(儀)’, ‘길 궤(軌)’가 합쳐진 말로, 그 이름에는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실은 왕실 및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마다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이를 참고할 수 있도록 의궤를 편찬했습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의궤는 1395년(태조 4)에 제작한 『경복궁조성의궤(景福宮造成儀軌)』로, 기록을 통해 조선 건국 직후부터 의궤 편찬 작업이 착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건국부터 시작을 같이한 의궤는 꾸준히 그 전통이 계승되어 대한제국 시기까지 편찬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현재 조선 전기에 제작된 의궤는 안타깝게도 임진왜란을 거치며 모두 소실된 상황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4)에 제작한
선조의 비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식에 관한 의궤,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입니다.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17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 의궤의 분류
의궤는 용도에 따라 크게 2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왕(혹은 황제)의 열람을 위한 <어람용(御覽用)>이며, 나머지 하나는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를 비롯한 관련 관서에서 보관을 위한 <분상용(分上用)>입니다. <어람용>과 <분상용>은 제작 과정부터 사용되는 재료·장식 그리고 작업에 투입되는 화원·장인까지 모든 부분에서 엄격하게 차별화되어 편찬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람용> 의궤에 사용된 종이는 국왕에게 올리는 글을 쓸 때 사용하던 두껍고 품질 좋은 ‘초주지(草注紙)’라는 고급 종이로, <분상용>은 이보다 질이 떨어지는 ‘저주지(楮注紙)’가 사용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의궤는 대부분 편찬 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이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림을 그린 필사본으로 그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어람용>의 필사의 경우 승문원과 규장각 소속 관원인 사자관(寫字官)들이 직접 해서체로 정성을 들여 글씨를 작성하고 화원들이 천연염료를 이용해 선명하게 그림을 그렸으며, 최종적으로는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표지에서도 삼베를 쓴 <분상용>과 달리 <어람용>은 고급 비단을 사용하여 제작했으며, 겉면에는 놋쇠를 만든 경첩을 부착하고 둥근 쇠고리와 국화 모양으로 된 장식 못으로 책을 고정하여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이렇듯 국왕에게 직접 바치기 위해 정성스레 제작된 <어람용> 의궤는 조선 왕실의 품격과 기록문화의 정수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3. 외규장각 의궤와 의궤의 수난사
(1) 외규장각의 건립과 의궤 보관
조선시대 강화도는 수도 한성부로 가는 진입로이자 동시에 전란 발생 시 국왕의 피난처로서, 국방상의 제일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여겨진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 왕실은 전란을 겪은 후 한양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강화도의 군사시설을 강화하고, 동시에 국가의 보장처로서 왕실 구성원들의 임시거처를 위한 행궁의 건립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강화도는 조선 왕실에서 한성부 이외에 국가의 중요 자료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를 위한 공간들이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강화부궁전도(江華府宮殿圖), 19세기, 국립중앙도서관
1622년(광해군 14)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봉안하는 영숭전(永崇殿)과 봉선전(奉先殿)의 건립을 시작으로, 강화도에는 왕실의 중요 서책들을 보관하는 건물들이 차례로 세워져 나갔습니다. 1660년(현종 1) 기존 강화도 마니산사고를 시설 보수 및 화재 사건 등의 이유로 인근 정족산으로 이전하였으며, 이후 1782년(정조 6)에는 행궁 동쪽의 정자 연초헌(燕超軒)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서고인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새롭게 건립되었습니다.
외규장각은 국왕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나누어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 행궁에 별도로 설치한 규장각이었습니다. 강화도에 새롭게 설치된 규장각은 기존에 이미 창덕궁 후원에 설립된 본각과의 구분을 위해 ‘바깥 외(外)’자를 붙여 ‘외규장각’이라 명명되었습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외규장각에 관한 내용입니다.
강화 유수 김익이 외규장각이 완성되었다는 것으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외규장각의 공사가 이제 끝이 났으니, 봉안할 금보(金寶)·옥보(玉寶)·은인(銀印)·교명(敎命)·죽책(竹冊)·옥책(玉冊)과 명나라에서 하사한 서적, 이전 왕대에서 봉안했던 서적, 보관되어 전해 오던 서적과 사고에서 옮겨 받든 어제(御製)·어필(御筆) 등의 서적을 기록하여 책자를 만들고서 내각(內閣)·외각(外閣) 및 서고(西庫)에 나누어 보관토록 하라. 하였다. - 『정조실록』 권13, 정조 6년(1782) 2월 14일 신사 3번째 기사 -

위의 기록을 통해 외규장각의 건립 이후,
정조는 강화도 곳곳 창고에 흩어져 있던 옛 서적들을 비롯하여 한성 내 서고의 문서들을 옮겨와 보관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규장각에 보관 중인 <어람용> 의궤를 포함하여
각종 왕실 용품과 중요 서적들 또한 외규장각으로 옮겨졌습니다.
제 2폭 외규장각도(外奎章閣圖), 19세기, 국립중앙도서관
1857년(철종 8)에 작성된 외규장각의 상황을 기록한 장부 『강화부외규장각형지안(江華府外奎章閣形止案)』에 의하면 당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인 자료는 왕실 물품과 어제·어필 등을 포함한 총 5,166점으로, 이 중 의궤의 비중은 401종 667책을 차지하고 있었던 걸로 파악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실로 상당수의 의궤가 외규장각에 보관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2) 병인양요와 의궤의 약탈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하면서 병인양요가 발발했습니다. 로즈(Roze. P. G.)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한 달 가까이 강화도를 점거하며 민가를 비롯한 여러 건물에 방화를 저질렀고, 이때 외규장각의 전각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철수 과정에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340여 권의 서적과 주요 왕실 자료를 본국으로 가져갔는데요. 여기에는 대다수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된 <어람용> 의궤와 단 1부만 존재하는 유일본 의궤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는 100년이 넘도록 과거 속에 묻혀 잊혀가던 중, 1978년 한 재불 학자에 의해 다시금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3) 다시 세상 밖에 나타난 외규장각 의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인들이 약탈해 간 문화재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몰라. 자네가 사학을 공부했으니 그 내용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바라네.” 1955년 8월 초,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병도 박사는 프랑스 유학을 떠나기 전 인사차 찾아온 한 여성 사학도에게 이 같은 당부를 했다. - 중앙일보 2007년 1월 8일자 기사 -
해당 기사글 속 여성 사학도는 한국에서 프랑스 유학비자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자 동시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가져간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낸 주인공인 ‘박병선 박사’입니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연구원으로 근무한 박병선 박사는 스승의 바람이자 자신의 꿈이기도 한 프랑스 소재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을 위해 본격적으로 자료탐색을 착수하였습니다.
그녀는 먼저 병인양요가 프랑스해군이 주동이 된 사건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 이들이 약탈해 간 물품 파악을 위해 프랑스 해군성 관련 자료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약탈당한 외규장각의 자료들이 ‘기증 도서’로 분류되어 파리의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도서관의 기증 도서 대장을 살펴보던 중 우연히 해군성에서 기장 받은 ‘340여 권의 동양 고서’의 존재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베르사유에 파손된 책을 보관하는 국립도서관 창고가 있는데 거기서 일하고 있는 분이랑 우연하게 밥을 먹다가 ‘한자로 된 책이 다발로 쌓여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분이 ‘본 일이 있다’라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당장 달려갔죠. 거기 (의궤가) 다 있었어요. - 프랑스 교민신문 주간지 ‘한위클리’ 2005년 4월 8일자 박병선 박사 인터뷰 내용 중 일부 -
1978년 10월, 마침내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베르사유 본관의 도서관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던 외규장각 자료 총 130종 345권을 찾아내게 됩니다. 약탈 도서의 발견 이후, 그녀는 목록을 작성하여 의궤 도서 297권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서지사항을 정리하여 의궤의 중요성을 프랑스 학계와 대한민국 정부에 알리고자 1985년 『조선조(朝鮮朝)의 의궤(儀軌)』를 발간하였습니다.
(4) 145년 만의 귀환
(이미지 클릭 시 링크된 영상으로 이동)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외규장각 의궤 귀환 환영 행사’, 2011.06.11. <영상 출처: 국가유산채널>
1991년 한국 외무부는 박병선 박사의 외규장각 도서 목록을 토대로 프랑스 외무성과의 접촉을 시작하고, 이듬해인 1992년 외교경로를 통해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공식적인 반환요청을 추진하였습니다. 1993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프랑스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회담을 진행하면서 대한민국과 프랑스, 양국의 교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회담에서 양국은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의 외규장각 의궤를 “교류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에 영구대여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고, 다음 날 실천의 상징으로서 프랑스는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 상 1권을 반환하였습니다. 이후 2010년 대한민국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회담 끝에 외규장각을 ‘5년 단위로 연장이 가능한 대여’ 형식으로 합의하면서 최종적으로 한국으로의 의궤의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4. 의궤 반환의 결실,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올해는 지난 2011년 5월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로부터 모두 반환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온 지 14년이 되는 해입니다.
물론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형식적으로는 ‘대여’의 개념으로서 반환이 이루어졌기에 ‘완전한 환수’가 아니라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의궤가 지닌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고려하면, 의궤의 반환은 우리 문화유산을 완전히 되찾고 이를 활용할 소중한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외규장각에 보관된 <어람용> 의궤는 기록물로서 그 가치 면에서 희소성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의궤는 단순히 상세한 기록과 정밀한 도해를 통한 사료적 가치를 넘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조선시대의 정치·문화·예술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랜 세월 우리 곁을 떠나있던 의궤가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으로써 많은 교훈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문화유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보존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일깨워주는 사례로 남게 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 『정조실록』
- 박제광 외 2인, 『조선의 보장지처, 강화 그리고 진·보·돈대』,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2020.
- 김선희, 「강화행궁의 건립과 공간구성: 『강화부궁전고』와 《강화부궁전도》 중심으로」, 『고궁문화』 13, 국립고궁박물관. 2020.
- 신병주, 「조선후기의 기록물 편찬과 관리」, 『기록학연구』 17, 한국기록학회, 2008.
- 이태진, 「외규장각 유지 조사기」, 『규장각』 1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91.
- 이홍기, 「고(故) 박병선 박사의 업적Ⅱ-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圖協會報(KLA bulletin)』 54-5, 한국도서관협회, 2013.
- 정상천, 「프랑스 소재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 과정 및 평가」,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3-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1.
-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중앙일보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시대법령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실 현장 사진자료들은 모두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번 문화유산 추천에서 소개해드릴 우리의 문화유산은 바로 ‘외규장각 의궤’입니다.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肅宗仁顯王后嘉禮都監儀軌)에 수록된 반차도,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1.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실' 공개
여러분 작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외규장각 의궤실’이 새롭게 개관된 것을 알고 계셨나요?
외규장각 의궤실은 기존 서화 1실을 개편해 마련된 새로운 전시실로,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였다가 2011년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해당 전시실은 단순한 유물 전시를 넘어 조선 왕실의 기록문화로서 의궤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는데요, 그렇다면 왜 많은 의궤 중에서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의궤만이 선택되어 전시되고 있는 걸까요? 지금부터 외규장각 의궤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보며, 기록물로서 외규장각 의궤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겠습니다.
2. 의궤란 무엇인가?
(1) 조선의 기록 정신, 의궤
의궤는 ‘본보기 의(儀)’, ‘길 궤(軌)’가 합쳐진 말로, 그 이름에는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실은 왕실 및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마다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이를 참고할 수 있도록 의궤를 편찬했습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의궤는 1395년(태조 4)에 제작한 『경복궁조성의궤(景福宮造成儀軌)』로, 기록을 통해 조선 건국 직후부터 의궤 편찬 작업이 착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건국부터 시작을 같이한 의궤는 꾸준히 그 전통이 계승되어 대한제국 시기까지 편찬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현재 조선 전기에 제작된 의궤는 안타깝게도 임진왜란을 거치며 모두 소실된 상황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4)에 제작한
선조의 비 ‘의인왕후 박씨’의 장례식에 관한 의궤,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입니다.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17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 의궤의 분류
의궤는 용도에 따라 크게 2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왕(혹은 황제)의 열람을 위한 <어람용(御覽用)>이며, 나머지 하나는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를 비롯한 관련 관서에서 보관을 위한 <분상용(分上用)>입니다. <어람용>과 <분상용>은 제작 과정부터 사용되는 재료·장식 그리고 작업에 투입되는 화원·장인까지 모든 부분에서 엄격하게 차별화되어 편찬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람용> 의궤에 사용된 종이는 국왕에게 올리는 글을 쓸 때 사용하던 두껍고 품질 좋은 ‘초주지(草注紙)’라는 고급 종이로, <분상용>은 이보다 질이 떨어지는 ‘저주지(楮注紙)’가 사용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의궤는 대부분 편찬 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이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림을 그린 필사본으로 그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어람용>의 필사의 경우 승문원과 규장각 소속 관원인 사자관(寫字官)들이 직접 해서체로 정성을 들여 글씨를 작성하고 화원들이 천연염료를 이용해 선명하게 그림을 그렸으며, 최종적으로는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표지에서도 삼베를 쓴 <분상용>과 달리 <어람용>은 고급 비단을 사용하여 제작했으며, 겉면에는 놋쇠를 만든 경첩을 부착하고 둥근 쇠고리와 국화 모양으로 된 장식 못으로 책을 고정하여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이렇듯 국왕에게 직접 바치기 위해 정성스레 제작된 <어람용> 의궤는 조선 왕실의 품격과 기록문화의 정수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3. 외규장각 의궤와 의궤의 수난사
(1) 외규장각의 건립과 의궤 보관
조선시대 강화도는 수도 한성부로 가는 진입로이자 동시에 전란 발생 시 국왕의 피난처로서, 국방상의 제일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여겨진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 왕실은 전란을 겪은 후 한양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강화도의 군사시설을 강화하고, 동시에 국가의 보장처로서 왕실 구성원들의 임시거처를 위한 행궁의 건립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강화도는 조선 왕실에서 한성부 이외에 국가의 중요 자료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를 위한 공간들이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강화부궁전도(江華府宮殿圖), 19세기, 국립중앙도서관
1622년(광해군 14)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봉안하는 영숭전(永崇殿)과 봉선전(奉先殿)의 건립을 시작으로, 강화도에는 왕실의 중요 서책들을 보관하는 건물들이 차례로 세워져 나갔습니다. 1660년(현종 1) 기존 강화도 마니산사고를 시설 보수 및 화재 사건 등의 이유로 인근 정족산으로 이전하였으며, 이후 1782년(정조 6)에는 행궁 동쪽의 정자 연초헌(燕超軒)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서고인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새롭게 건립되었습니다.
외규장각은 국왕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나누어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 행궁에 별도로 설치한 규장각이었습니다. 강화도에 새롭게 설치된 규장각은 기존에 이미 창덕궁 후원에 설립된 본각과의 구분을 위해 ‘바깥 외(外)’자를 붙여 ‘외규장각’이라 명명되었습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외규장각에 관한 내용입니다.
1857년(철종 8)에 작성된 외규장각의 상황을 기록한 장부 『강화부외규장각형지안(江華府外奎章閣形止案)』에 의하면 당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인 자료는 왕실 물품과 어제·어필 등을 포함한 총 5,166점으로, 이 중 의궤의 비중은 401종 667책을 차지하고 있었던 걸로 파악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실로 상당수의 의궤가 외규장각에 보관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2) 병인양요와 의궤의 약탈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하면서 병인양요가 발발했습니다. 로즈(Roze. P. G.)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한 달 가까이 강화도를 점거하며 민가를 비롯한 여러 건물에 방화를 저질렀고, 이때 외규장각의 전각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철수 과정에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340여 권의 서적과 주요 왕실 자료를 본국으로 가져갔는데요. 여기에는 대다수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된 <어람용> 의궤와 단 1부만 존재하는 유일본 의궤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는 100년이 넘도록 과거 속에 묻혀 잊혀가던 중, 1978년 한 재불 학자에 의해 다시금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3) 다시 세상 밖에 나타난 외규장각 의궤
해당 기사글 속 여성 사학도는 한국에서 프랑스 유학비자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자 동시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가져간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낸 주인공인 ‘박병선 박사’입니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연구원으로 근무한 박병선 박사는 스승의 바람이자 자신의 꿈이기도 한 프랑스 소재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을 위해 본격적으로 자료탐색을 착수하였습니다.
그녀는 먼저 병인양요가 프랑스해군이 주동이 된 사건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 이들이 약탈해 간 물품 파악을 위해 프랑스 해군성 관련 자료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약탈당한 외규장각의 자료들이 ‘기증 도서’로 분류되어 파리의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도서관의 기증 도서 대장을 살펴보던 중 우연히 해군성에서 기장 받은 ‘340여 권의 동양 고서’의 존재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1978년 10월, 마침내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베르사유 본관의 도서관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던 외규장각 자료 총 130종 345권을 찾아내게 됩니다. 약탈 도서의 발견 이후, 그녀는 목록을 작성하여 의궤 도서 297권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서지사항을 정리하여 의궤의 중요성을 프랑스 학계와 대한민국 정부에 알리고자 1985년 『조선조(朝鮮朝)의 의궤(儀軌)』를 발간하였습니다.
(4) 145년 만의 귀환
(이미지 클릭 시 링크된 영상으로 이동)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외규장각 의궤 귀환 환영 행사’, 2011.06.11. <영상 출처: 국가유산채널>
1991년 한국 외무부는 박병선 박사의 외규장각 도서 목록을 토대로 프랑스 외무성과의 접촉을 시작하고, 이듬해인 1992년 외교경로를 통해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공식적인 반환요청을 추진하였습니다. 1993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프랑스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회담을 진행하면서 대한민국과 프랑스, 양국의 교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회담에서 양국은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의 외규장각 의궤를 “교류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에 영구대여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고, 다음 날 실천의 상징으로서 프랑스는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 상 1권을 반환하였습니다. 이후 2010년 대한민국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회담 끝에 외규장각을 ‘5년 단위로 연장이 가능한 대여’ 형식으로 합의하면서 최종적으로 한국으로의 의궤의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4. 의궤 반환의 결실,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올해는 지난 2011년 5월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로부터 모두 반환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온 지 14년이 되는 해입니다.
물론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형식적으로는 ‘대여’의 개념으로서 반환이 이루어졌기에 ‘완전한 환수’가 아니라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의궤가 지닌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고려하면, 의궤의 반환은 우리 문화유산을 완전히 되찾고 이를 활용할 소중한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외규장각에 보관된 <어람용> 의궤는 기록물로서 그 가치 면에서 희소성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의궤는 단순히 상세한 기록과 정밀한 도해를 통한 사료적 가치를 넘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조선시대의 정치·문화·예술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랜 세월 우리 곁을 떠나있던 의궤가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으로써 많은 교훈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문화유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보존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일깨워주는 사례로 남게 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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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광 외 2인, 『조선의 보장지처, 강화 그리고 진·보·돈대』,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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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기, 「고(故) 박병선 박사의 업적Ⅱ-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圖協會報(KLA bulletin)』 54-5, 한국도서관협회, 2013.
- 정상천, 「프랑스 소재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 과정 및 평가」,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3-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1.
-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중앙일보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시대법령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실 현장 사진자료들은 모두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