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화유산 추천은 경주의 아름다운 야경의 명소로 알려져 있는 신라의 문화유산 동궁과 월지를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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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 전경(사진 출처 : 국가유산청) |
1. 임해전지와 안압지에서 동궁과 월지로 이름이 바뀐 이유
동궁과 월지 이곳의 예전 이름은 임해전지와 안압지였습니다. 2011년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익숙했던 경주 월지는 2011년 정식명칭이 경주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습니다. 사적의 명칭이 변경된 이유는 안압지가 신라 시대 ‘월지’로 불렸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고, 왕위를 계승할 태자가 머물던 곳이라는 설이 유력해지면서 임해전지는 동궁으로 명칭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왜 사적지 이름을 안압지라고 붙였던 것일까요?
성종 17년(1486)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 의 내용을 통해 이미 조선시대에는 안압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雁鴨池는 天柱寺의 북쪽에 있다. 문무왕은 궁안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巫山 12봉을 형상화했는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 그 서쪽에 臨海殿의 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
이미 조선시대에는 '월지'라는 이름은 세간에서 잊혀지고 안압지라는 명칭이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불려진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사료 상 안압지와 임해전지는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유적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갖지 못합니다. 1975년 발굴조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 지역은 잡초만 무성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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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신라 옛터> "무심한 잡초만이 안압지와 임해전..." |
당시 발굴조사에 참여했었던 조사단의 기억을 잠시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동현(당시 안압지 발굴 조사단장, 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발굴조사 전 안압지가 내가 알기로 준설 전에는 사람들이 그냥 유적지로 생각했었어요.
임해정이라고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그랬어요. 안압지는 지금과 달리 호안석축도 안보이고, 그냥 웅덩이처럼 연못이 있었어요.
<못 속에서 찾은 신라 - 45년 전 안압지 발굴조사 이야기>, 2020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p. 26.
윤근일(당시 안압지 발굴 조사원,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그 당시 안압지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가운데 물이 고여있는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못 속에서 찾은 신라 - 45년 전 안압지 발굴조사 이야기>, 2020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p. 26.
발굴이 시작되자 이러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신라의 문화를 복원하는데 어마어마한 자료를 제공하면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안압지에서는 나무로 된 배가 썩지 않고 발견되면서 통일신라 때의 배 양식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물이 발견됨과 동시에 주령구, 남근 등 다양한 나무로 된 유물들이 나오면서 신라의 놀이 문화와 종교 문화 복원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때 발견된 목제 주령구, 배, 남근 등은 미숙한 보존과정에서 파손 및 소실되기도 하였습니다.
관심이 고조되자 안압지의 실체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 중
東宮을 처음으로 짓고 비로소 內外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하 19년
는 기록이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임해전지로 이해되면서 발굴보고서가 나오기 전 임해전지는 동궁 안압지는 동궁의 원유(苑囿)로 규정되었습니다. 안압지의 명칭이 실제 연못의 명칭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1978년에 발간된 발굴조사보고서부터 제기가 되며 실제 명칭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후 1982년 연구에서 동궁의 성격에 대한 논의와 안압지가 월지라는 논의가 이루어지며 처음으로 안압지 일원이 ‘동궁(태자궁)과 월지’로 인식되었습니다.
2. 동궁과 월지는 어떤 곳일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동궁은 태자가 머물던 곳이기에 붙여진 명칭으로 다른 의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동궁과 월지의 명칭이 바뀌었을 무렵 학계에서 동궁과 월지 성격을 둘러싼 열띤 토론이 이어져 왔습니다.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하 14년
봄 정월에 동모제同母弟 수종秀宗을 부군副君으로 삼고 월지궁月池宮에 입궁시켰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4년
임해전臨海殿을 거듭 수리하고 동궁 만수방東宮 萬壽房을 새로 지었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5년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 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고적
문헌 기록을 통해 동궁과 월지는 휴식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며, 태자가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목간 등장한 ‘월지궁’, ‘태자’ 등에 대한 내용과 문헌 기록들을 통해 월지 인근의 임해전지는 월지궁 혹은 동궁으로 널리 인식되면서 논리적인 통설로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밀하게 검토하고 연구 자료가 쌓여가면서 여기에는 해결 해야할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동궁과 월지설은 출토된 명문과 『삼국사기』 직관지의 동궁관 기사를 통해 형성되었던 것으로 1978~1982년 검토 시 유적의 규모나 성격에 대해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접근되어 해당 문제가 남아있게 됩니다.
규모로 인해 발생한 논란
‘월지궁 = 동궁 = 태자궁’으로 보는 인식은 헌덕왕이 822년 동생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한 기록을 근거로 이와 같은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문제점
현재까지 발굴된 건물터의 규모가 너무 큼(26동 정도)
태자궁에 월지가 정원으로 부속될 만큼 태자의 권력이 막강했다고 보기 어려움
월지궁의 정전으로 여겨지는 임해전도 연회를 베푼 장소로 태자궁이 되기 어려움
이러한 문제가 기존 학설을 뒤흔들 정도의 문제 제기였으나 목간 등의 기록에서 월지와 태자에 대한 기록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어 동궁과 월지설을 완전히 폐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궁은 태자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에 궁을 의미하며, 동궁 내에 태자궁이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의견을 수정하게 됩니다. 이에 동궁, 월지궁, 태자궁에 대한 논의가 학계에 또 다시 논의가 필요해지게 되었으며, 동궁 내에 위치한 안압지의 성격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지게 되었습니다.
3. 동궁과 월지의 최신 소식..!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약 50년에 이르는 연구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동궁과 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잡초가 무성했던 안압지는 제 모습을 드러냈으며, 본 이름이 잊혀졌던 안압지에서 월지로 이름을 찾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또, 월지에서 발견된 신라 유물들은 당시의 문화를 복원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동궁에 대한 물음은 아직 해결하기에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동궁의 위치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발굴이 2018~2021년 이루어집니다. 기존에 인식되었던 월지 서편은 왕궁 내 중심 구역, 동쪽은 태자의 구역으로 건물의 높낮이가 설정되어 위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이에 월지궁과 동궁을 별개로 이해하여 태자가 머물렀던 동궁을 월지 동편 구역으로 월지 서편을 왕을 위한 구역으로 이해하며 이 곳을 월지궁으로 이해하려는 해석이 이어졌습니다. 다만 월지를 중심으로 동궁의 위치가 월지 동편의 어느 쪽이냐에 학자마다 이견이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굴조사와 꾸준한 문헌 검토로 동궁의 위치가 합리적으로 추정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크기로 이슈가 되었던 동궁과 월지.. 성격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정궁으로 인식되었던 월성과 함께 동궁과 월지의 위치가 어떤 역사로 해석될지 너무나도 기대됩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김경열, 동궁과 월지 주변 건물군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신라사학보 57, 2023.
이현태, '경주 동궁과 월지'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와 쟁점, 선사와 고대 72, 2023.
경주 동궁과 월지 - A건물지 발굴조사보고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22.
못 속에서 찾은 신라 - 45년 전 안압지 발굴조사 이야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20.
조선일보
오늘의 문화유산 추천은 경주의 아름다운 야경의 명소로 알려져 있는 신라의 문화유산 동궁과 월지를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1. 임해전지와 안압지에서 동궁과 월지로 이름이 바뀐 이유
동궁과 월지 이곳의 예전 이름은 임해전지와 안압지였습니다. 2011년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익숙했던 경주 월지는 2011년 정식명칭이 경주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습니다. 사적의 명칭이 변경된 이유는 안압지가 신라 시대 ‘월지’로 불렸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고, 왕위를 계승할 태자가 머물던 곳이라는 설이 유력해지면서 임해전지는 동궁으로 명칭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왜 사적지 이름을 안압지라고 붙였던 것일까요?
성종 17년(1486)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 의 내용을 통해 이미 조선시대에는 안압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조선시대에는 '월지'라는 이름은 세간에서 잊혀지고 안압지라는 명칭이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불려진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사료 상 안압지와 임해전지는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유적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갖지 못합니다. 1975년 발굴조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 지역은 잡초만 무성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발굴조사에 참여했었던 조사단의 기억을 잠시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발굴이 시작되자 이러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신라의 문화를 복원하는데 어마어마한 자료를 제공하면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안압지에서는 나무로 된 배가 썩지 않고 발견되면서 통일신라 때의 배 양식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물이 발견됨과 동시에 주령구, 남근 등 다양한 나무로 된 유물들이 나오면서 신라의 놀이 문화와 종교 문화 복원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때 발견된 목제 주령구, 배, 남근 등은 미숙한 보존과정에서 파손 및 소실되기도 하였습니다.
金銅阿彌陀三尊板佛坐像
<사진출처 : 이뮤지엄>
金銅板菩薩坐像
<사진출처 : 이뮤지엄>
사진 출처 : <못 속에서 찾은 신라 - 45년 전 안압지 발굴조사 이야기>, 2020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p. 55.
관심이 고조되자 안압지의 실체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 중
는 기록이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임해전지로 이해되면서 발굴보고서가 나오기 전 임해전지는 동궁 안압지는 동궁의 원유(苑囿)로 규정되었습니다. 안압지의 명칭이 실제 연못의 명칭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1978년에 발간된 발굴조사보고서부터 제기가 되며 실제 명칭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후 1982년 연구에서 동궁의 성격에 대한 논의와 안압지가 월지라는 논의가 이루어지며 처음으로 안압지 일원이 ‘동궁(태자궁)과 월지’로 인식되었습니다.
2. 동궁과 월지는 어떤 곳일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동궁은 태자가 머물던 곳이기에 붙여진 명칭으로 다른 의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동궁과 월지의 명칭이 바뀌었을 무렵 학계에서 동궁과 월지 성격을 둘러싼 열띤 토론이 이어져 왔습니다.
문헌 기록을 통해 동궁과 월지는 휴식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며, 태자가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목간 등장한 ‘월지궁’, ‘태자’ 등에 대한 내용과 문헌 기록들을 통해 월지 인근의 임해전지는 월지궁 혹은 동궁으로 널리 인식되면서 논리적인 통설로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밀하게 검토하고 연구 자료가 쌓여가면서 여기에는 해결 해야할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동궁과 월지설은 출토된 명문과 『삼국사기』 직관지의 동궁관 기사를 통해 형성되었던 것으로 1978~1982년 검토 시 유적의 규모나 성격에 대해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접근되어 해당 문제가 남아있게 됩니다.
규모로 인해 발생한 논란
‘월지궁 = 동궁 = 태자궁’으로 보는 인식은 헌덕왕이 822년 동생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한 기록을 근거로 이와 같은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기존 학설을 뒤흔들 정도의 문제 제기였으나 목간 등의 기록에서 월지와 태자에 대한 기록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어 동궁과 월지설을 완전히 폐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궁은 태자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에 궁을 의미하며, 동궁 내에 태자궁이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의견을 수정하게 됩니다. 이에 동궁, 월지궁, 태자궁에 대한 논의가 학계에 또 다시 논의가 필요해지게 되었으며, 동궁 내에 위치한 안압지의 성격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지게 되었습니다.
3. 동궁과 월지의 최신 소식..!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약 50년에 이르는 연구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동궁과 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잡초가 무성했던 안압지는 제 모습을 드러냈으며, 본 이름이 잊혀졌던 안압지에서 월지로 이름을 찾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또, 월지에서 발견된 신라 유물들은 당시의 문화를 복원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동궁에 대한 물음은 아직 해결하기에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동궁의 위치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발굴이 2018~2021년 이루어집니다. 기존에 인식되었던 월지 서편은 왕궁 내 중심 구역, 동쪽은 태자의 구역으로 건물의 높낮이가 설정되어 위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이에 월지궁과 동궁을 별개로 이해하여 태자가 머물렀던 동궁을 월지 동편 구역으로 월지 서편을 왕을 위한 구역으로 이해하며 이 곳을 월지궁으로 이해하려는 해석이 이어졌습니다. 다만 월지를 중심으로 동궁의 위치가 월지 동편의 어느 쪽이냐에 학자마다 이견이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굴조사와 꾸준한 문헌 검토로 동궁의 위치가 합리적으로 추정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크기로 이슈가 되었던 동궁과 월지.. 성격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정궁으로 인식되었던 월성과 함께 동궁과 월지의 위치가 어떤 역사로 해석될지 너무나도 기대됩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김경열, 동궁과 월지 주변 건물군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신라사학보 57, 2023.
이현태, '경주 동궁과 월지'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와 쟁점, 선사와 고대 72, 2023.
경주 동궁과 월지 - A건물지 발굴조사보고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22.
못 속에서 찾은 신라 - 45년 전 안압지 발굴조사 이야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20.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