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맑은 술과 물을 담는 그릇 이(彛) 조선의 예를 논(論)하다.

2024-11-13
조회수 36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 일례로 ‘예’와 ‘효’를 기반한 제사입니다. 고대부터 제사를 모시기 위해 다양한 왕실 문화와 제례가 발달하였으며, 이에 격에 맞는 갖춤이 갖추어지고 전래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만나보는 조선시대의 제기는 당시 정치사상과 철학을 표현하는 하나의 매개체였습니다. 그래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왕실의 제기 기종, 기형, 문양은 제사의 성격에 따라 엄격히 선별되어 진설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소개드릴 문화유산은 이 제기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수량에 따라 제사의 위계가 달라지는 보(簠), 궤(簋), 변(籩), 두(豆)가 아닌 물과 술을 담는 수기(水器)이자 주기(酒器)인 이(彛)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1. 이의 종류와 쓰임

제사에는 술을 담는 주기와 물을 담는 수기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때 물과 술을 담는 기종으로 이·준·뢰가 있으며 이에는 계이(鷄彛)·조이(鳥彛)·가이(斝彛)·황이(黃彛)·호이(虎彛)·유이(蜼彛)가 있으며 준에는 희준·상준·호준·착준·대준의 5종이 있으며 뢰에는 산뢰가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각 기종에는 나름의 기준이 적용되고 제사 때 사용하는 술을 담고 있으며, 진설 제도에 따라 상에 올려지게 됩니다. 이때 대체로 이 종류는 1회정도 진설되며 명수와 울창주가 담깁니다.

이는 다소 생소할 수 있습니다만 술을 담는 기종 중에서 이는 종묘나 종묘에 버금가는 제사에만 한정되어 사용할 정도로 왕실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제기입니다. 계이·조이·가이·황이·호이·유이 각각에는 닭·새·벼·눈·호랑이·원숭이가 문양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문양에 따라 이를 사용하는 계절과 제사의 격이 달라졌습니다. 계이와 조이는 봄과 여름에 사용하고, 가이와 황이는 가을, 겨울에 사용하였으며, 호이와 유이는 체향과 협향에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호이와 유이는 체향과 협향에 사용되어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조선시대에는 호이와 유이가 제기로 제작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조선에서는 황제가 내린 구장복에 종이(宗彛)로 불리는 문양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 호이와 유이가 그려져 실제 종묘제례를 지낼 때는 6개의 이가 모이게 됩니다.

 

2. 이의 의미

중국에서는 일찍이 6개의 이를 사용하였으며 시대에 따라 조금씩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조선에서는 이를 제작할 때 『예서』를 참고하여 제작하였습니다.

 

1) 계이와 조이

조선에서 참고하고 있는 『예서』에서는 계이에 사용되는 닭은 인을 상징하고, 조이의 새는 예를 상징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조이와 계이는 봉황과 닭 그림을 새겨 넣은 것을 말한다. 닭은 동방을 상징하는 조물로 仁에 해당되고, 새는 남방을 상징하는 조물로 禮에 해당된다. 이것이 선왕이 계이와 조이를 봄의 祠 제사와 여름의 禴제사에 사용한 까닭이다. 봄의 사 제사에는 계이에 명수를 담고 조이에 울창주를 담으며, 여름의 약 제사에는 조이에 명수를 담고 계이에 울창주를 담는다.”라고 하였다. 

- 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제기도설

계이, 조선, 높이 24.8cm, 국립고궁박물관

(사진 출처 : 이뮤지엄)

조이, 조선, 높이 23.7cm, 국립고궁박물관

(사진 출처 : 이뮤지엄)


2) 가이와 황이

가이는 곡식을 문양으로 하고 있으며, 의를 상징했다고 적고 있으며, 황이는 황금색 눈을 문양으로 그려 넣어 신을 뜻하고 있습니다.

 

"斝는 稼로 읽으니, 가이는 禾稼를 그린 것이다. 황이는 黃目의 준이다. 황목은 황금으로써 눈[目]을 만든 것이니, 鬱氣가 준에 올라가매, 황은 중中이요, 눈은 氣의 淸明이다. 술잔 속에 술을 따라서 밖에 청명함을 말한 것이다. 가을 제사[秋嘗]와 겨울 제사[冬烝]에 강신할 적엔 가이와 황이를 사용하는데, 상나라에서는 가이를 사용하고, 周나라에서는 황목을 사용하였으므로, 주나라의 이가 黃色이었다면, 상나라의 이는 白色이었던 것이다. 백색은 陰의 質이니 義요 황색은 음의 美이니 信이다. 이것이 선왕께서 가을 제사와 겨울 제사에 가이와 황이를 사용했던 까닭이다."
- 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제기도설 

가이, 조선, 높이 23.3cm, 국립고궁박물관

(사진 출처 : 이뮤지엄)

황, 조선, 높이 23.3cm, 국립고궁박물관

(사진 출처 : 이뮤지엄)


3 조선시대에 호이와 유이가 사라진 이유


조선시대에는 제례를 적고 있는 기록에는 대부분 호이와 유이가 빠져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호이와 유이를 종묘제사의 주요 제기로 채택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후속연구가 많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하나 호이와 유이가 진설된 제사의 성격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현전하는 기록에는 고려시대 호이와 유이를 사용하였던 기록이 전해집니다. 고려에서는 『예기』의 원리에 따라 제사가 진행되었고 3년에 한번 씩 10월에 협제(祫祭), 5년에 한 번씩 4월에 체제(禘祭)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때 종묘 제향에는 체협친향의, 유사섭사의, 별묘향에 호이와 유이를 진설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들이 진행될 때는 태묘 및 별묘에 있는 신주를 모두 모셔와 제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4월, 10월에 해당하는 제사는 지내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앞서 이야기한 4개의 이와는 구분되는 요소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고려 태묘가 조선의 종묘제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체협제를 설정하고 실행한 부분에 대해 이견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고려시대에는 실제 태묘에서 친향과 섭행의 사례를 『고려사』를 통해 확인해보면 대부분이 체협제로 이루어졌으며, 시향은 찾기 힘들며 조선의 경우 이 체제에 대해 황제례라고 하여 오례 단계에서 이를 배제하고 협제 의식만 설정하게 됩니다. 이마저도 조선 초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실제 행해지지 못하면서 폐지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즉 호이와 유이가 진설될 수 있는 제사가 명나라와의 관계와 조선 내 정치적인 문제로 실질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멸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17세기 초부터 18세기에 이르면 청대 학자들 사이에서 경전을 고대의 역사로 인지해 예를 역사적 사건으로 체계적으로 재구성하여 접근하여는 움직임을 형성하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조선 내에서도 조선 초 사라진 체제와 협제에 대한 의미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이 이루어집니다. 이에 호이와 유이가 실제 제사에서 사용되는 술과 물을 담는 제기인지, 왕이 제사에서 입는 구장복에 들어가는 문양 중 하나인 종이가 맞는지에 대한 논쟁 사례도 등장합니다.


참고문헌

구혜인, 조선시대 왕실 제기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9.

신진혜, 조선후기 종묘의례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1.

이상훈, 조선 초기 종묘제사의 의례정비,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21.

이명선, 조선후기 호문백자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22.

1 0

상호명 : 사단법인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

대표자 : 홍선호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28, 5층 500호-32 

e-mail : ktaca3326@ktaca.or.kr 

전화번호 : 02-733-3326

Fax : 02-747-9847 

사업자 등록번호 : 847-82-00370

통신판매업 등록번호 : 제 2023-서울종로-0013 사업자정보확인 >

대중문화예술기획업 등록번호 : 제 24109-2022-000011

COPYRIGHT (c) 2022 BY Korea Traditional Art Convergence Agency ALL Rights Reserved.


카카오톡 채널 채팅하기 버튼